공간 가변크기
2019년 9월 5일 ~ 2019년 9월 22일
떨리는 켄, 캔버스라는 대지
“희미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도시 하나가 자신의 몸을 접어 지면을 향해 수렴한다.
(………………………………….)
외딴 섬 같은 도시는 주황색의 아침 햇살 속에서 자리를 잡고, 펼쳐져서, 바로 선다.
도시 주변으로 희끄무레한 구름이 일어난다.”
- 하오징팡, 「접는 도시」, 『고독 깊은 곳』, 강초아 역, (글항아리, 2018), p. 21.
도시 전환
이지현 작가를 만나 작업에 대해 얘기를 나눌 때면, 글의 시작에 앞서 인용한 하오징팡(郝景芳)의 소설 「접는 도시」가 떠올랐다. 이 SF소설의 주인공 라오다오는 베이징의 ‘접는 도시’ 중 제3공간에 거주하는데, 누군가의 부탁으로 다른 공간으로 목숨을 걸고 이동한다. 3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접는 도시’는 계급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의 양도, 공간의 너비도 다르다. 계급 간 이동은 물론, 공간과 시간이 모두 단절된, 가상의 혹은 미래의 세계다. 새벽 6시, 고층빌딩이 기울어지며 큐브처럼 접혀 땅으로 들어가면, 잠자고 있던 다른 도시가 깨어나는 형태다. 이지현과 관련해 주목한 부분은 ‘도시 전환’이다.
이지현은 도시를 접고, 다른 도시로 넘어가는 중이다. 이 전환 사이에 많은 그림들이 생겨났다. 이전 도시의 끝 무렵부터 앞으로 열릴 새로운 도시를 예고하는 지금까지, 회화와 색연필 드로잉이 끝없이 새어나왔다. 이지현에게 캔버스는 하나의 에너지 변형 공간이다. 그는 현실에서 온 감정과 시각적 잔상을 캔버스에서 분해하고, 재배열한다. 이 캔버스-대지에서 기존에 그를 엮던 억압적 질서로부터 전달된 부정적 에너지가 분할, 변형을 거쳐 소멸해간다. 때론 평면의 레이아웃을 늘려 그만큼 대지를 쪼개 기존의 힘을 무화한다. 대지의 평면을 포 뜨듯 나누어버리자 단단해 부서질 것 같지 않던 기운이 쇠멸해간다.
그가 자신의 삶과 그 변화의 의지를 토대로 작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4년에 열린 개인전 《Hysterical Play [히; 극]》에서 그가 받아온 ‘억압’의 뒷면으로 ‘히스테리컬한 극’이 펼쳐졌다. 자화상 <거울 속의 나>는 머리와 등 뒤에 온통 눈물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자신을 그린 그림이다. ‘나’의 뒷모습 앞에 비친 것은 좀처럼 ‘나’의 얼굴이지는 않은 것 같은, 울룩불룩한 고릴라의 얼굴이다. 이 괴기스러운 얼굴은 계속해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들의 표현일 것이다. 정말로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이라면, ‘나’ 없어진 ‘나’일 것이다. ‘나’를 객관적으로 설명하고자, 변호하고자, 지켜내고자, 혹시라도 모르니 끝없이 의심하면서 나를 무대에 올리고, 귀를 열어 타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를 들려주며 주변을 곱씹었던 그다. 최근 그의 그림에 ‘나’는 등장하지 않는다. 객관화하려는 나, 나를 설명하기 위한 ‘나’는 없다. 나의 세상을 스스로, 가장 적극적으로 빠져나오는 ‘나’만이 있다. 작가이자 화자로서 작업을 제시하는 그는 작업에 보이지 않게 머무르기도 하면서 동시에, 완성한 그림을 자신에게서 벗겨낸다. 이전 작업에서 현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스스로 무대에 올라 신경증적으로 웃어버렸다면, 지금의 그는 캔버스 위에서 분해한 현실을 동력삼아 전환을 이루어낸다.
시간의 재배열
불안한 마음으로 다리를 떨던 그 간격처럼, 색연필과 붓은 무수히 위아래로 움직이며 굽이쳤다. 생략되었던, 도망가 버렸던, 스스로 묻어두었던 시간을 되돌리기를 시도했다. 회화, 회화를 준비하는 에스키스, 그리고 드로잉을 그렸다. 특히 색연필로 제약적인 시간에서 벗어나 자유로우면서도 세밀하게, 한 땀 한 땀 시간을 직조했다. 시간을 조정하는 일은 과거의 ‘나’의 시간에도 영향을 준다. 그는 유년시절 좋아했던 ‘스트리트파이터’ ‘드래곤볼’ ‘호호형제’ ‘코난’과 같은 애니메이션을 되새겼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와 접하게 된 놀이하는 이미지, 아이와 살며 본 모든 일상 세계의 이미지를 부분적으로 자신의 대지로 가져왔다. 돌, 초, 인형. 주로 이지현은 애니메이션이나 GIF의 흔들리는 이미지를 화면에서 꺼내왔다. 떨어져 나온 부분적인 이미지 각각에 설정된 시간과 공간의 질서를 무화하고, 나의 작동원리를 만드는 요소들로 취했다. 좌절된 시간을 움직이게 하고자, 시간의 초침을 이동시킨다. 타임머신을 타는 시간 여행이 아니라, 내 손으로 시계를 돌리는 것과 같은 전환, 시간의 재배열이다.
공간을 접고 빠져나왔으니 일시적으로는 공간이 없다. 아니면 캔버스를 대지삼아 전환을 시도했으니 다른 곳으로 이동한 셈이다. 공간 없는 공간에서 <Kens>가 만들어졌다. 버퍼링의 기록처럼 평면 위에서 파이터 ‘켄’이 미끄러져 내려온다. 애니메이션에서 이미지 한 장에 할당된 짧은 시간을 하나의 캔버스에 연속적으로 모아둠으로써, 시간의 흐름이 하나의 시간으로 고정되었다. 기존의 시간과 배경에서 이탈한, 얼굴 없는 켄의 몸이 사방으로 갈라진다. 또는 반복된다. 켄은 쇠진하면서 강화된다. 하나의 켄이 열 세 개로 나눠져 해체되면서도 열 세 배로 늘어 에너지가 강화되는, ‘지우기’와 ‘만들기’라는 두 가지 운동이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이다. 물감 자국은 남았더라도, 평면적으로 추상화되고 만 켄의 배경으로 원근감 있는 타원형 기둥이 반복된다. 평면에 깊이를 더하는 작가만의 균형 잡기 방식이다. 막 만들어진 회색의 대지에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하는 켄.
드래곤볼의 주인공 손오공을 모티브로 한 <Lost FACE>에서도 기존의 도시를 뒤로하고 발돋움하는 이지현의 접혀있던 마음이 펼쳐진다. 회색의 대지 위에 알 수 없는 또 다른 대지가 개입해 있고, 그 레이어 위에 얼굴 없는 손오공의 상반신이 고정돼 있다. 그 뒤로는 그가 잃어버린 얼굴이 바위나 차가운 달처럼 두 번 반복된다. 얼굴에서 분리된 채로 두 번 그려진 눈 두 쌍은 평면의 회색 대지와 그 위에 알 수 없는 대지 사이에 껴, 눈을 부릅뜨고 있다. 손오공의 몸에서 분리돼 그의 눈으로 기능을 할 수 없지만,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꽤나 강력하다. 이지현은 차용한 캐릭터의 이미지 요소를 ‘분리’와 ‘반복’을 통해 캔버스라는 하나의 시간과 공간 안에 포갠다.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어 나갈 바닥의 타일을 붙여나가듯이 이지현이 그려낸 그림들이 ‘가변크기’의 벽면에 걸렸다. 점차 전시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스스로를 대변하는 곳으로서, (단순한 이해나 변호의 장이 아니라) 모든 개인의 다양성이 교차하는 장으로 기능해가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볼 때, 스스로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이지현의 그림들 앞에 서서 우리의 지금의 삶, 연결된 과거, 바꿔나갈 미래에 귀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 작가가 마주할 새로운 세계는 어떠할지 궁금해지는 지금도 그는 다가올 미래를 직조해내고 있을 것이다.
글: 김솔지
출처: 공간 가변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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