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갤러리
2019년 8월 23일 ~ 2019년 9월 7일
그림이 되기 위한 형상
안소연 미술비평가
그것은 다시 그림이 되기 위해 형상을 갖는다. 이 형상들은 여럿의 풍경에서 불려 나온 것인데, 어떤 분위기로, 장소 간의 낙차 없이 “닮음” 속에 공존한다. 흡사 사진처럼 우연 속에서 풍경의 한 찰나를 특별한 어떤 것으로 끌어내는 시각적 감동을 일으키면서도, 그는 현실의 풍경을 바라보던 눈의 감각을 경유하여 붓을 쥔 손에 이르러 이미 눈이 본 것에 대해 그릴 것을 다짐한다. “오후 서너 시”라는 공간적 시간과 “벽과 벽 사이”라는 시간적 공간을 병치시킨 전시의 제목처럼, 이현우는 그러한 풍경의 조건들이 이루어내는 회화적 장면을 드러내기 위해 붓의 흔적과 형태의 자리를 세밀하게 조율한다. 그림 그리는 이의 눈에 붙들린 풍경은 마치 그림이 되기 위한 형상으로 존재했던 것처럼, 풍경 그림 앞에 서게 될 또 다른 이의 경험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표현된다. 붓의 떨림과 물감의 두께, 추상적인 선과 색의 자리, 그 모든 것들의 당위를 설명하기위해 결정된 형상으로서의 풍경처럼, 펼쳐놓은 이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그의 그림 앞에 서있는 자들이 겪어야 할 바라봄의 경험이다.
그가 말한 대로, 그는 풍경 속에서 “일상이 회화로 전환되는” 순간을 관찰한다. 오후 서너 시, 벽과 벽 사이로 특정된 풍경의 조건은, 그것이 회화로 전환되는 예측할 수 없는 모험을 일으킨다. 그것은 풍경의 한 장면을 지시함으로써 재현된 대상과 동일한 것, 즉 “같음”으로 간주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그것과 닮은 형상들이 현실로부터 멈춘 채로 비장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환기시킨다. 각각의 형상들이 지닌 추상성과 다수의 붓질이 지닌 적막감이 이러한 존재의 인식을 크게 북돋아주는데, 이는 그 그림 앞에 멈춰 선 구경꾼의 시선을 (잠시) 사로잡아둠으로써 어떤 사건처럼 예측할 수 없이 일어난다. 이처럼 평범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상의 단조로운 풍경들이 회화로 전환되는 순간에 다다르기 위하여, 이현우는 사진가의 시선과 회화적 경험이 어떤 일치와 공감을 이루는 현상학적 지각의 역설에 대해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가늠해 보면, 그는 시각 중심의 재현과 맞서 불화를 조장하는 다수의 감각에 의한 지각 경험을 통해 사진의 본질에 대해 사유했던 바르트(Roland Barthes)의 논의와 불확실한 회화에 있어서 체험된 시각을 강조했던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논의를 어떤 이미지에 대한 사유의 접점 안에 중첩시켜 놓도록 한다. 그의 적막한 그림 앞에서, 나의 생각은 여기까지 이른다.
이현우의 개인전 《오후 서너 시, 벽과 벽 사이》에는 큰 그림 일곱 점과 작은 그림 열한 점이 서로 마주하는 두 개의 전시 공간에 나뉘어 함께 설치됐다. 이러한 대비와 그것의 공존은 그의 작업 전반에서 일관된 태도로 드러난다. 이현우는 피치 못할 불협의 정황이 어떤 파열을 일으키기 바로 직전에 (도리어 역설적인 균형을 과시하면서) 상황을 동결시키려는 듯 회화적 사건의 불확실성을 화면에 크게 구축한다. 이를테면, 재현과 추상의 불확실한 혼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임의의 조형적 질서를 찾아내려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때에는, 일관성 없는 붓의 흔적들이 한 화면에서 조형적 불균형을 초래할 위기를 드러내기도 했고 형태와 배경의 극단적인 대비가 텅 빈 화면을 구축할 정도로 시각적 불화를 극대화시켰던 적도 있었다. 그가 지속해온 일련의 태도는, 어찌됐건 풍경 속에 푹 파묻히게 될지도 모를 회화의 존재에 대해 되레 그것(풍경-대상)으로부터 벗어난 사유의 가능성을 탐색해왔다. 그는 일상에 붙들린 평범한 풍경이 언젠가 평면의 비장한 질서를 성취해낼 “그림”이 되기 위한 명분을 찾아 제시함으로써, 그 경험의 간극에 놓인 불확실한 정황에 대해 지각할만한 임의의 필연적인 가능성을 살핀다. 말하자면, 오후 서너 시, 벽과 벽 사이 같은 그런 것이다. 요컨대, 그가 말하는 “일상이 회화로 전환되는” 경험의 간극에서 그 명제의 당위를 얻기 위해 그는 오래 전 시각 중심의 관습적 경험에서 물러나 신체의 추상적 지각 경험에 몰두했던 회화적 전환을 다시 상기시킨다.
이때, 어떤 의미에서건 전시의 공간은 풍경과 그림 사이를 오가는 우리의 지각과 그에 따른 추상적 사유를 돕는다. 전시장의 동선은 크게 둘로 분할되어 있는데, 사각형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대각선이나 혹은 원의 지름처럼 생긴 하나의 창/벽이 그 둘을 매개하는 자리에 있다. 그 창/벽은 아주 얕은 두께의 공간을 갖고 있어서, 제 뒤로는 꽉 찬 큰 공간을 지탱시키고 있으며, 정면을 향하여는 투명한 유리면을 통과하여 마주한 신체를 아우르면서 경험의 공간을 확장시키고 있다. 분할과 매개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이 경계는, 지각하는 주체에 의해 사유되는 추상의 공간을 탄생시킨다. 이렇게 전시 공간의 건축적 구조가 새삼스럽게 “공간”에 대한 사유의 지평을 이끄는 데에는 나름의 짐작할만한 이유가 있다. 이현우는 유리로 감싼 그 작은 외벽 사이에 그림 한 점을 걸었다. <줄긋기>(2018)라는 제목의 그림이 함의하는 회화적 명분은, (가만히 들여다 볼 때 서서히 드러나는) 그것의 추상성과 적막한 붓질의 조형성에서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것은 내가 볼 때 “발견해내는” 것이다. 100호가 넘는 캔버스를 세로로 놓고 그린 이 그림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숱한 선들이 교차하면서 구축되는 색면의 추상적 조형에 대한 사유를 돕는다. 유리창 너머 얕은 공간에 놓인 이 그림과 마주 서서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은, 어떤 것과 닮아 있는 이 형상들 가운데 유독 “줄긋기”의 행위가 새롭게 출현시키는 추상적 존재에 대한 경험에 이르게 될 것이다.
줄긋기의 행위는 이처럼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닌데, 대상에 묶여 있는 명확한 윤곽선과 달리 이 줄긋기는 “일상이 회화로 전환되는” 임의의 사건을 매개하게 될 (말없는) 사유의 실체가 된다. <줄긋기>에서는, 벽과 바닥 사이에 기대어 놓은 여덟 개의 막대가 언뜻 완전하게 멈춘 정물 같은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거의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막대를 특정한 사물로인식해버리려는 시각적 충동을 상쇄시키듯, 이현우는 그 대상으로부터 해방되어 곧 공간 지각에 몰두할 “줄긋기”를 감행한다. 즉, 사물에 대한 인식을 한껏 추월하여 일련의 풍경이 지시하는 대상에 시선을 붙들어 놓지 않고 급기야는 “사물 없이” 줄긋기의 행위가 일어나는 추상의 공간을 사유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면에 그어진 여러 개의 줄은 사물(대상)의 윤곽이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 없이 혹은 그것과의 닮음만을 허용하면서) 공간의 형상을 지각하도록 여럿의 감각을 확장시켜주는 존재에 가깝다. 이 그림에서 줄긋기의 연쇄적인 행위는 임의의 시간을 내포하는 풍경의 공간적 특성에 의한 의외의 발견이라서, 이러한 순간적인 포착을 통해 뒤늦게 발견될 조형적 질서는 그림을 바라보는 이들에게서도 다시 한 번 일어나는 예측 불허의 모험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 창/벽을 지나 공간으로 진입해 들어가면 거기에는 대략 30호 안팎의 크기를 가진 작은 그림들이 둘씩 짝을 이루듯 큰 벽에 놓여있다. <벽과 벽 사이>(2019)와 <네다섯>(2019), <서너 시>(2019)와 <늘어진 오후>(2019)처럼 엇비슷한 크기로 그려진 특정 시공간의 인상은, 큰 풍경의 일부를 잘라내 많은 누락과 생략을 감행함으로써 (예측할 수 없었던) 익숙하게 닮은 어떤 분위기로 맞닿아 있다. 서로 닮은 이 “작은 그림들”에서, 이현우는 <줄긋기>로 시도했던 추상적 조형 질서에 대한 사유를 보다 구체적인 몸의 지각으로 탐색해 보려는 듯하다. 추측해 보건대, 그는 여기서 “큰 그림”과는 조금 다른 시도로 회화에 대한 지각 경험을 살핀다. 이를테면, <벽과 벽 사이>에서는 수직선과 대각선이 이루어내는 어느 정도의 공간감과 무채색의 명도가 나타내는 형태의 중첩이 단번에 구경꾼들의 시선을 끌지만, 여기서는 (마치 <줄긋기>에서 사물의 형태에 붙들리지 않은 추상의 선들을 발견해냈던 것처럼) 드러나지 않은 화면 바깥의 광경에 대한 바라봄이 반드시 경험되어야 할 테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자의 경험,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흰 색의 큰 벽에 걸린 <벽과 벽 사이>와 <네다섯>에서, 이 불확실한 풍경들이 나를 이끌어주는 시각적 감동은 드러난 것들 외의 “나머지”의 존재를 내가 지금 여기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의 틀 바깥과 견주어 한없이 작은 이 그림이 드러내는 현전은, 잘려나간 나머지의 풍경을 지각하려는 순간에 나타난다. 이현우는 작은 그림들에서 유독 화면을 자르는 화가의 선택에 대해서 주목했는데, 그는 회화의 고유한 특성을 특히 화면 자르기에서 찾았던 것 같다. 흥미롭게도 사진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려 했던 바르트도 사진의 틀에 주목하면서 사진에 “가려진 시야”를 만들어내는 화면 바깥에 대한 인식을 크게 강조했다. “보는 사람을 그것의 틀 밖으로 끌고 가는” 가려진 시야에 대한 간파, 즉 가려진 것의 현전을 알아채는 주체의 탁월한 경험이 필요하다.
이현우는 일상 세계의 풍경에서 “가려진 시야”로 포착되는 장면들을 사진에 담았다가 그 경험을 다시 회화로 전환시킨다. 이때, 몇 가지 중요한 회화적 사건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데, 그는 회화적 기법과 표현을 적절히 다루면서 재현과 추상 사이의 “닮음”과 본다는 행위의 “불확실성”에 대한 미적 경험의 당위를 찾는다. 상대적으로 “큰 그림”에 해당하는 <벽과 벽 사이>를 비롯해 또 다른 자리에 놓인 다섯 점의 회화를 보면 좀 더 명확하다.[*이번 전시에는 <벽과 벽 사이>라는 제목으로 서로 다른 두 점의 그림이 있다.] 작은 그림들에서는 회화의 틀 너머에 대한 지각이 크게 작용하여 어쩌면 보는 행위를 넘어서는 적극적인 공간 지각에 대한 사유의 과정을 이끌었다면, 여기, 큰 그림들에서는 틀 내부의 회화 표면에 대한 추상적 경험을 보다 극대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 물기 없이 쌓아 올린 색채, 색면과 색면 사이의 경계에서 감지되는 붓의 떨림, 화면을 가로지르는 여러 사선이 일으키는 평면성과 공간감의 혼재 등 화면 내부에 존재하는 형상들은 일제히 “어떻게 보이는가?”하는 지각 경험에 대해 환기시킨다. 아니, “어떻게 보는가?”로 질문을 다시 바꿔보자. 이현우의 (큰) 그림들은 대상으로부터 어떤 형상의 나타남과 주체의 바라봄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이 두 개의 나란한 신체적 현전이 열어주는 회화에 대한 현상학적 경험을 부추긴다. 그가 종종 자신의 그림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관람자와 그림이 서로를 마주 바라보는 느낌”이라는 게 회화로 전환된 일상 풍경이 어떤 주체에게 또 한 번 일으키는 회화적 전환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의 “마주함”이라는 신체의 체험에 의해서 일어나는 사건이며, 그가 회화를 이해하는 방식인 것 같다. 이현우는 보는 방법에 대한 의도를 굳이 내세우지 않고, 회화를 통해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경험하는 신체와 다른 신체, 이 둘 사이의 우연한 “교차”와 필연적인 “공존”을 더욱 강조한다. 그는 작업에서 이러한 지각 경험이 회화적 사건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사유하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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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누크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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