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토
1999년 12월 10일 ~ 2000년 2월 27일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며 호암미술관이 준비한 특별기획전은 ‘회고와 전망’의 성격과 '한국적 정체성의 확인'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대상으로 정하였다 인물표현은 미술에서 중요한 주제이며 한국미술에서도 한국인의 생활과 사상과 감성이 잘 드러난다. 이번 전시에서는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를 포괄하고 조각과 회화를 망라하는 넓은 범위에서 한국미술의 특징을 뚜렷이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표현 미술품 약 200점을 선정하였다. 작품들은 평면과 입체로 구분되어 평면은 호암갤러리에서, 입체는 로댕갤러리에서 전시된다. 전통회화작품으로는 다양한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풍속화, 유교이념에 기반하여 생전의 모습을 묘사한 초상화, 아름다운 미인도 등이 선보이고, 현대회화는 20세기의 격변기에 등장한 새로운 사회 속의 다양한 현대인의 개성적인 표현이 주를 이룬다. 전통조각은 고대의 고고유물, 토우를 비롯하여 불교조각과 민간조각이 출품되는데, 모두 시대마다 독특하게 구현된 민족적 감수성이 담겨있다. 현대조각은 새로운 시각으로 파악된 인체와 현대인의 실존적 상황이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나타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언제나 인류 공통의 것이며 미술 속에서 메아리처럼 남아있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며 열리는 이 전시가 한국미술 속에 나타난 과거와 현재의 인간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힘찬 도약을 위한 바탕이 되기를 바란다.

작자미상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
조선 18세기, 비단채색, 156.5×65.3㎝, 호암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원래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또는 <수원능행도(水原陵幸圖)>라 불리는 여덟 폭의 병풍이었으나 현재는 분리되어 한 폭만 전하고 있다. 정조가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아 그의 무덤인 현륭원을 참배하고 회갑연을 베풀었는데, 이 과정을 문헌기록으로 상세히 남겨 놓았으며 주요 장면을 그림으로 묘사하였고, <능행도> 병풍도 여러 벌 만들었다.
이 장면은 참배를 마치고 다시 도성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화성을 출발한 후, 시흥의 행궁에 다다른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당시 기록을 따르면 6000 여 명의 인원과 1400 여 필의 말이 동원되었을 정도로 장대한 행렬을 이루었는데, 이를 상하로 긴 화면에 갈짓자로 잘 배치하여 놓았다. 세세한 묘사와 화려한 산수표현이 두드러지며, 행렬을 구경하는 백성들의 자유분방한 모습도 눈길을 끈다. 현재 전하는 <능행도>중에도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에 속한다.

작자미상 [회혼례도첩(回婚禮圖帖)]
조선 18세기, 비단채색, 33.5×45.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모두 5면으로 구성된 이 화첩은 혼인한 지 예순 돌을 축하하는 혼례장면을 그리고 있다. 옛날에는 자신이 태어난 갑자(甲子)가 60년만에 돌아오는 회갑(回甲), 과거에 급제한 지 60주년이 되는 회방(回榜) 그리고, 회혼을 3대 수연(壽宴)으로 여겼다. 회혼례는 자손들이 부모를 위하여 베풀며, 늙은 부부는 다시 혼례 복장을 하고 결혼식을 올린다. 특히 조선후기에 널리 행해졌으며, 높은 관직에 있거나 지낸 바가 있는 경우는 나라로부터 궤장이 하사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손들과 친지들로부터 장수를 비는 술잔을 받는 헌수(獻壽)를 행하고, 이어서 친척들이나 하객들이 축배를 올리고 시문을 지어 바친다.
첫째 면은 남편이 기러기 아범을 앞세우고 부인이 기다리고 있는 집안으로 가는 장면이고, 둘째 면은 자손들과 하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차일을 치고 모란병풍을 둘러친 혼례청에서 식을 올리는 장면이다. 셋째 면은 노부부가 남녀로 구분해서 앉은 자손들로부터 술잔을 받는 헌수 장면이고, 넷째 면과 다섯째 면은 남편이 여러 하객들과 함께 연회를 하는 장면이다. 비록 화면은 다소 손상되었지만 섬세한 필치로 인물과 건물을 정확히 묘사하고 화사한 채색을 사용하여 성대한 잔치장면을 구석구석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계화(界畵) 양식의 건물도에는 평행사선투시도법이 사용되고 있으며, 복식, 기물, 병풍, 가옥구조 등이 상세히 묘사되어 당시 생활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윤두서 [자화상(自畵像)]
조선 18세기, 종이담채, 38.5×20.5㎝, 국보 240호, 개인소장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는 어부가로 잘 알려진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으로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겸재(謙齋) 정선(鄭敾)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삼재(三齋) 라 일컬어질 만큼 뛰어난 문인화가였다. 당시 기득세력에 소외된 남인(南人) 집안 출신인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은 채 학문과 예술에 전념하였다. 그는 폭넓은 독서로 여러 분야에 깊은 학식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서화에도 재능이 있어 산수, 인물, 화조, 풍속 등에 두루 능하였다. 특히 말 그림과 인물화에 뛰어나 이 <자화상>이외에도 친구인 심득경(沈得經)의 초상을 그리기도 하였다.
정면을 응시하는 얼굴을 강조하여 극사실적으로 그린 이 작품은 만물을 합리적으로 파악하려 했던 윤두서의 철학과도 통하고 있다. 얼굴의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하여 여린 필선을 반복하여 음영을 부각시켰고, 윤곽선을 따라 뻗쳐있는 구렛나루 수염과 턱수염은 얼굴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변상벽·한종유 [김재로초상(金在魯肖像)]
조선1760년, 비단채색, 152.8×81.6㎝, 호암미술관 소장
화재(和齋) 변상벽(卞相璧)은 영모, 동물, 초상을 잘 그렸는데 특히 고양이 그림을 잘 그려 '변고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러나 실재로는 초상화에 더욱 뛰어나서 '당대의 국수(國手)'라 칭해졌다. 한편 한종유(韓宗裕, 1737∼?)는 화원집안 출신으로 김득신, 김석신 형제의 외삼촌이었다. 도화서 화원이었던 그는 초상화에도 뛰어나 정조어진을 그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이 작품은 당대의 우수한 초상화가 두사람이 합작해서 그린 작품으로, 특히 변상벽의 솜씨를 살필 수 있어 그 의의가 크다.
청사(淸沙) 김재로(金在魯, 1682∼1759)는 노론의 일원으로 소론과의 당쟁에서 여러차례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였다. 이인좌의 난때는 공을 세우고 좌의정이 된 후 1737년에는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고 1740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김재로는 1738년 주청사(奏淸使)로 북경에 갔을 때 중국인 화가 시옥(施玉)으로부터 초상화를 그려받았는데, 정면 모습의 중국 초상화는 이 작품과 사뭇 다른 인상을 준다. 시옥의 초상화에는 김재로의 아들인 김치인이 1760년에 어제찬(御製贊)과 서(序)를 써넣었는데, 김재로의 사망소식을 들은 영조가 1732년때의 초상을 기억하여 이를 다시 그리게 한 후 찬을 하사 하였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김재로 사후 그의 51세때 모습을 다시 이모(移摹)한 초상화가 된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다른 김재로의 초상과 다소 다르고 오히려 아들인 김치인(金致仁, 1716∼1790)의 모습과 비슷하여 좀더 연구를 요한다.
18세기부터는 초상화의 배경으로 화려한 중국식 채전 대신 조선의 화문석이 등장한다. 이는 숙종 어진을 진재해(秦再奚)가 그렸을 때 여러 대신들이 논의하여 수정한 것으로 검박한 조선성리학의 기풍에 바탕한 새로운 조선적 초상화의 발전이었다. 기법 면에서도 얼굴의 경우 배채(背彩)를 가하고 간략한 선염으로 명암을 처리하여 해맑고 투명한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작품에서도 창백할 정도로 얼굴은 밝게 처리되었고 아주 제한적으로만 음영을 가하였다. 반면 안정된 자세와 자연스러운 의습의 묘사로 차분하고 단아한 풍격을 보여준다.

작자미상 [미인도(美人圖)]
조선 18세기, 종이채색, 117.0×49.0㎝, 개인 소장
이 미인도는 전라남도 해남에 위치한 녹우당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곳은 선비화가로 3대에 걸쳐 이름이 났던 윤두서, 윤덕희, 윤용 일가의 종가로서 여러 화적이 함께 전하고 있어 어떤 관련성을 추측하게 한다.
커다란 가체머리를 매만지며 서있는 이 여인은 자주색 선을 대고 꽃무늬 장식이 있는 노랑삼회장 저고리에 옥색치마를 입고 있다. 어깨와 팔의 윤곽이 드러나게 달라붙는 저고리는 이 당시의 형식이었고, 짧은 저고리 아래로 살짝 드러난 속살과 빨간 띠가 눈길을 끈다. 가체머리가 무거운 듯 무릎을 살짝 구부린 탓으로 치마는 항아리처럼 풍성하다. 이러한 가체풍속은 조선후기에 사치가 심해져서 정조 때는 왕명으로 금지시키자는 주장이 나왔을 정도였다.

김홍도 [큰머리여인]
조선 19세기, 종이채색, 24.7×26.0㎝, 서울대박물관 소장
'단원(檀園)'이라는 김홍도의 호가 적혀 있지만 화풍상 다른 김홍도의 작품들과는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다른 배경 없이 거울을 보면서 가체머리를 다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표현하였는데, 두 팔과 다리의 자세, 약간 기울어진 상체로 일상의 한 순간을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붉은 섶과 동정을 붙인 노랑저고리는 가늘고 유연한 선묘로 처리하여 앳된 젊은 여인의 얼굴을 강조하는 반면, 짙은 색의 풍성한 치마는 굵고 각진 필선으로 가냘픈 몸매를 감추는 듯하다. 치마사이로 왼편 무릎이 드러나고 그 아래로 자그마하게 버선발이 나와 있는데, 이렇게 여인의 작은 발은 전통적으로 춘의(春意)를 암시한다

김득신 [수하일가도 (樹下一家圖)]
조선, 18세기말∼19세기초, 종이담채, 27.5×33.0㎝, 호암미술관 소장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745-1822)은 유명한 화원집안인 개성김씨 집안의 출신으로 김응환의 조카이자 김 석신의 형이다. 그는 산수, 화조, 인물, 풍속 등의 여러 분야에서 당대의 거장 김홍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여 름 나무 아래서 짚신을 삼고 물레를 돌리는 부부와 갓난아기의 모습이 매우 정겹게 느껴지는 이 작품은 야외에 앉 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클로즈업하여 배경없이 화면 중앙에 배치하여 일상생활의 한 장면을 강조하고 있다. 짚신을 삼고 있는 사내의 차림새와 자세에서 힘을 들여 일을 하는 것을 정확히 묘사하려는 의도를 알 수 있다. 반면 여자를 묘사하는 필선은 달라 굵고 부드럽게 구사하고 있다. 노동하는 인간을 생활의 중심에 놓는 현실인식과 사실적 표현을 중시하는 표현양식은 당시 풍속화의 경향을 잘 드러낸다.

이한철·이창옥 [이하응초상 (李昰應肖像)]
조선, 1880년, 비단채색, 126.8×65.0㎝, 서울시립박물관 소장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고종의 아버지로 흥선대원군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의 와중에서 불우한 시절을 보내면서 호신책으로 시정배들과 어울려 서민생활을 하기도 하다가, 정쟁의 와중에서 둘째아들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자 대원군이되어 섭정을 하였다. 그는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왕권을 강화하며 외세를 물리치고 조선을 중흥시킬 여러 가지 개혁정치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막대한 예산이 소요된 경복궁 재건과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로 민심을 잃고, 며느리 명성황후와의 갈등으로 결국 정계에서 추방되었다. 그후 거듭되는 재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권력의 중심에는 다가갈 수 없었다. 그는 서화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난초로 유명하였다. 이 작품은 이하응이 환갑을 맞던 해의 초상으로 스스로 제발을 적어놓았다. 이에 따르면 이한철(李漢喆), 이창옥(李昌鈺)이 그렸고, 이례적으로 장황(粧 )을 한홍적(韓弘迪)이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머리에 쓴 둥근 관은 정면에 흰 점들로 장식하였고, 짙은 남색의 도포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데 바닥에는 화려한 양탄자가 깔려있다. 얼굴은 윤곽선 주위에 검게 선염을 가하고 살색의 필선을 가늘게 반복하여 굴곡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은 이항응이 거처하던 운현궁(雲峴宮)에 전해오던 것으로 이와 동일한 양식의 초본이 서울대박물관에 전하고 있으며, 간송미술관에는 이한철이 그린 상반신 초상이 있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같은 얼굴에 금관조복을 입은 초상이 소장되어 있다. 희원(希園) 이한철(1808∼1893이후)은 화원 이의양(李義養)의 아들로 역시 화원이었으며 헌종어진의 주관화사로 활약한데 이어, 철종, 고종의 어진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그의 초상화 실력은 당시 조중묵(趙重默)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 이창옥(李昌鈺)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당시 연로했던 이한철을 도와 함께 참여했던 화가로 추정된다.

진재해, 송시열초상 [(宋時烈肖像)]
조선, 1680년 이후, 비단채색, 97.0×60.3㎝, 호암미술관 소장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노론의 영수로 생원시를 장원으로 합격 후 학문적 명성을 널리 떨쳤고, 후일의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그는 효종의 신임아래 북벌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으나 효종이 죽은 후 재야로 낙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서인과 남인의 당쟁과정에서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으나 노론이 집권함에 따라 다시 복권되었다. 송시열은 일생을 주자학 연구에 몰두한 거유로서 조광조, 이이의 학통을 이어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어 후대에 크게 추앙받게 되었다. 이 작품은 송시열이 74세때의 초상으로 화면 우측에 '後學安東金昌業寫 副護軍 秦再奚摹'라고 적혀있다. 현재 제천 황강영당에 또 한폭의 74세 초상이 전하고 있는데 복식은 다소 차이가 나지만 얼굴은 거의 동일하므로 두 작품의 선후관계가 좀더 연구될 필요가 있다. 특히 이 해는 경신대출척으로 송시열이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관직에 올랐던 때이며, 김창업이 초상화를 기초하고 화원이 이를 완성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므로 이 작품이 바로 기록상의 것일 가능성도 있다. 얼굴은 살색으로 칠한 후 중요한 주름만 필선으로 표현하고 그 주위에 옅은 선염으로 음영을 가했다. 이렇게 평상복인 심의(深衣)를 입고 복건( 巾)을 쓴 모습은 재야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선비를 상징하기도 한다. 벽은(僻隱) 진재해秦再奚(?∼1735이전)는 화원으로 숙종의 어진을 주도적으로 작업하였고 산수도 잘 그렸다. 특히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로 칭송받아 여러 사대부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진달, [손을 허리에 댄 나부]
1934년, 캔버스에 유채, 90×70.5cm, 호암미술관
도풍(滔風) 서진달(徐鎭達)은 대구의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연구소에서 수업을 받고 1935년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아카데믹한 화풍을 익혔다. 1942년 졸업하기까지 힘이 넘치는 인물화 등으로 여러 차례 선전에 입선하여 역량을 인정받았다. 동경미술학교 재학시절 세잔느에 심취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후기인상파적인 조형요소가 강한 풍경화와 정물화가 주류를 이룬다. 한때 대구의 계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변종하, 김창락 등을 지도하였으나 방랑벽과 말년의 무절제한 생활로 1947년 결핵으로 일찍 사망함으로써 독자적인 자기세계를 구축하지 못하였다.
정면의 나부 상반신이 화면 가득히 자리잡고 있는 <손을 허리에 댄 나부>는 풍만한 여체의 건강미를 명암의 대비와 색상의 변조로 표현하고 군데군데 짙은 윤곽선으로 같은 색조의 배경과 구분하면서 왼손을 허리에 대어 구성상의 변화를 유도하고 있다. 대담한 구도와 거친 붓터치, 시원한 면처리를 사용하여 김관호나 김인승의 누드에서 보이는 서양의 이상적 인체비례를 적용하지 않고 건강한 한국의 토속적 여인상을 미화시키지 않은 채 사실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이쾌대 [부인도]
1943년, 캔버스에 유채, 70×60cm, 개인 소장
경북 칠곡 출신의 이쾌대(李快大)는 동경 제국미술학교를 졸업(1939)하였고, 근대화단에서 보기 드물게 서양미술사와 미술이론은 물론 고미술에 대한 연구까지 두루 섭렵한 민족의식이 강한 작가였다. 재학시절 백우회, 하라츠바 양화전(1935), 녹포사 공모전(1938), 재동경미술학생 종합전에 참가하였으며 이과전에 연 3회(1938~1940) 입선하였다. 1941년에는 김종찬, 이중섭, 진환, 최재덕 등과 조선신미술가협회(~1944)를 결성하고 동경(3월)과 서울(5월)에서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해방 후 조선미술건설본부(1945), 독립미술협회(1946), 조선조형예술동맹(1946)에 참가하고 조선미술동맹 위원장(1946)을 역임하였다. 1948년에는 성북회화연구소를 열어 김서봉, 김창열, 심죽자, 전뢰진 등을 양성하고 1949년에는 제1회 국전 추천작가로 선정되었다. 9·28 서울 수복 직전 북으로 가던 중 국군에게 체포되어 부산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953년 남북포로 교환 당시 북으로 갔다.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회 세계청년축전에 참가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으며 1987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43년에 제작한 <부인도>는 신미술가협회를 통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그가 이전의 서양화 기법의 정형화된 양식과는 달리 그 자신만의 새로운 회화적 언어를 개발하고, 전통적인 회화에서 소재를 발견한 도상들과 동양화적인 얇은 색면 처리, 몰골법에 가까운 선묘 등을 사용해 그린 작품이다. 이와 같은 경향의 작품으로는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족두리를 쓴 여인>, <말> 등이 있다. 제3회 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한 <부인도>는 두터운 물질감이 상당 부분 사라지고 화면을 분할하는 짙은 선묘를 중심으로 붉은 저고리와 푸른 치마를 입은 여인과 화면의 노란색 배경이 평면화되어 삼차원적 공간의 깊이를 느끼지 못하게 하며 정면을 향하고 있는 여인조차 현실적인 공간에 존재하는 인물이 아닌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곱게 한복을 차려 입은 부인의 모습을 전경으로 고구려 벽화에 나타나는 말과 새 등을 배경으로 처리하여 전통적이며 민족적인 색채를 반영하였다.

임옥상 [우리시대의 초상]
1986년, 종이에 부조, 아크릴릭, 67×120cm, 개인 소장
1950년에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민중미술계열 작가 임옥상(林玉相)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출신으로 프랑스 앙굴렘 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광주교육대학과 전주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80년대를 대표하는 새로운 미술운동 모임인 ‘현실과 발언’의 창립회원으로 우리가 처한 사회 모순을 고발하고 시대정신을 찾고자 왕성한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소통으로서의 미술, 미술과 현실인식의 조화를 추구하면서 최근에는 표현기법의 제한없이 다양한 성격의 작품을 소화해내고 있다.
우리 사회현실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 계층간의 위화감 및 농민의 삶의 실상을 강한 메시지와 탁월한 조형적 실험으로 형상화해 온 그는 <우리시대의 초상>에서 대한민국의 건강한 남성이면 누구나 동원되어야 하는 군복무, 민방위 소집, 예비군 훈련을 상징하는 의복과 일상의 현대도시인이 의례적으로 입고 다니는 양복을 입은 자신의 자화상을 화면에 병치시켜 획일적인 우리 삶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박상옥 [시장소견]
1957년, 캔버스에 유채, 105×169.7cm, 호암미술관
박상옥(朴商玉)은 서울 출신으로 동경 제국미술학교를 졸업(1939)하고, 선전과 국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조선미술가동맹을 결성(1946)하고 광복 후 이인성, 오지호, 박영선 등과 더불어 독립미술협회를 창립하였으며 구상화가들의 모임인 목우회 창립회원(1958)이었다. 제3회 국전(1954)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래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서울 교육대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대부분 인물과 풍경을 주로 그렸으며 특히 향토적인 풍물의 소재를 아카데믹한 화풍으로 즐겨 표현했다.
제6회 국전(1957)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출품된 <시장소견>은 1950년대 장터의 풍경을 공간감 있게 표현하고 있는 박상옥의 대표작이다. 멀리 보이는 산을 배경으로 북적대는 장터의 모습을 대각선의 엇갈린 구성으로 생동감 넘치게 묘사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사용한 나이프로 긁는 기법과 수채화와 같은 경쾌한 붓질, 적황색을 주로 사용하여 토속적인 분위기를 한껏 살려내고 있다. 화면 중심을 비운 타원 구도로 외곽을 밀도 있게 구성하고 대상들은 볼륨감을 약화시켜 다소 평면적으로 처리하면서도 풍부하고 구수한 질감효과 속에서 시골 장터의 풍경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이종구 [속·농자천하지대본-연혁]
1984년, 부대종이에 아크릴릭, 170×100cm, 작가소장
80년대 이른바 민중미술, 현실주의 계열의 대표적 작가인 이종구(李鍾九)는 1954년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에서 태어났고, 중앙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였다. 1976년부터 현재까지 일곱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1990년 <오지리의 사람들>전을 모교인 오지초등학교 운동회 날 열기도 하였다. 그는 1984년부터 땅의 진실만을 믿고 살아온 아버지와 오지리 사람들의 초상화, 그들의 삶이 담긴 농촌풍경, 소외된 정치나 문화현실의 대비 등을 통해 농촌현실의 구조적 모순에 근접하기 시작해 점차 사회현실로 확대시켜 가고 있다. 초기 양곡 부대에 농민의 초상을 담은 그는 나중에 장지 위에 그 농촌 붕괴의 파노라마를 자연스러운 소묘와 하이퍼리얼리즘 기법을 활용하여 묘사한다. 그는 진득한 주제 의식을 통해 희생자이면서 우리 문화의 두터운 뿌리인 전형적인 농민상을 빚어 냈다. 고향 땅의 사람들을 통해 농촌 현실의 모순과 아픔에 눈을 뜬 그는 자신의 가족사 그림인 <속·농자천하지대본> 연작을 1984년 후반 제3회 임술년전시회에 발표하여 본격적인 농민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속·농자천하지대본-연혁>은 농부인 아버지를 모델로 정부미 양곡 부대종이를 화폭 삼아 제작한 것으로 초기 가족사 그림에 해당한다. 풍년 농사에 과장된 웃음을 짓고 있는 정부 선전물의 농부 사진과 햇빛에 그을려 구리빛으로 드러나는 피부 뒤에 근심 어린 아버지의 반신상을 치밀한 사실주의 기법으로 대비시켜 농촌현실을 담아내고 있다. 태극기와 표창장, 농부, 정부미 양곡 부대종이 등 그의 작품의 소재들은 농촌 현실의 모순에 관해 암시하며 현실인식의 확대를 전달한다.

서용선, [소음]
1991년, 캔버스에 아크릴릭, 181.5×226.5cm, 작가소장
서울 출신의 서용선(徐庸宣)은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극사실 또는 포토리얼리즘의 기법을 활용한 소나무 그림들로 처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84년 이후 그는 역사 속 특정한 개인의 실존에 초점을 맞춰 단종애사를 주제로 일종의 역사화 계통의 그림을 그리는 한편 동일한 비중으로 이 시대 보편적 인간으로서 현대 도시인의 소외와 실존에 초점을 맞춘 지하철의 시민들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특히 단단한 구성과 강렬한 색채, 끈기있고 다양한 기법의 실험과 탐구를 통해 감성을 객관화 시키는 특유의 기법이 주목되고 있다.
<소음>은 익명의 도시 사람들을 소재로 서울과 같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대도시에 첨예화 되어 나타나는 인간 소외의 현상에 따른 개인의 무력감을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개별인물들은 상호 연관되지 않은 채 서로 단절되어 있는 자세를 취하고, 배경은 나름의 독립된 기호의 성격을 지니며 화면 요소들간의 융합보다는 대치가 강조된다. 애매하게 처리된 화면과 평면공간감을 사용함으로써 작가가 도시의 일상이미지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채도가 낮은 원색을 통한 시각적인 왜곡은 비인간적인 도시의 질서를 위해 강요되는 기호와 신호체계를 거부하려는 무의식적 감정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도시라는 공간 속에 함께 살면서도 사람마다 서로의 감정과 의식이 갈리고 차단되는 상황을 통합하여 실존적 위기에 처한 현실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희동 [자화상]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진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은 서울 출생으로 조석진과 안중식의 문하에서 전통회화를 배웠다. 1903년부터 1908년까지 농상공부 광학국 주사, 궁내부 대신방 서기랑 등의 관직을 거친 후 190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다. 1915년 귀국 후 서화협회를 창설(1918)하고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나, 1920년대 중반 이후 다시 산수화의 세계로 돌아갔다. 해방 이후 조선미술건설본부 중앙위원장,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 심사위원, 대한미술협회 회장, 민주당 참의원 등을 역임했다. 이 <자화상>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동경예술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또 다른 그의 자화상과 함께 우리나라 양화 도입기의 대표적인 유화이다. 유화라는 새로운 표현재료를 습득해가는 초창기의 이 작품은 얼굴에 나타난 의도적인 하이라이트식의 명암법이 아직 익숙치 않은 유화에 대한 이해를 대변해 주고 있다. 푸른 두루마기를 입고 가르마를 한 짧은 신식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청년의 매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이 마치 반명함 사진을 연상케 하면서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전직 관료출신이자, 개화된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의 신분을 암시하고 있다.

윤석남(1939~) [어머니 Ⅱ]
1995년, 혼합 재료, 200×200×150cm, 작가소장
중국 봉천에서 태어난 윤석남(尹錫男)은 서울 사대부중 시절 그림을 접하였으나 70년대 후반 불혹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화업에 입문하였다. 1983년 미국으로 건너가 약 1년 동안 판화 등을 배우면서 정규 미술교육을 대신하였다. 작가로서 비교적 늦은 출발을 하였던 그는 특히 여성문제와 관련한 우리 사회의 몰이해와 구조적 모순을 새로운 형식으로 보여 주어 주목을 받아왔다. 여성주의미술의 역사가 일천한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그는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기반으로 역사와 미학을 검토하기에 이 분야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킬 가능성을 보여준다. <어머니Ⅱ>는 근대기에 영화감독이었던 아버지 윤백남을 따라 만주 일대를 유랑하며 고생하시던 어머니를 모티브로 하였으나, 동시에 이 땅의 모든 익명의 어머니를 대변하는 작품으로 90년대 초부터 시작된 <어머니>연작 중 하나이다. 이 작품 속의 어머니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희생자, 가부장적 사회 이데올로기 속에서 강요된 희생과 제도적 폭력의 희생자이다. 젊은 시절의 모습들을 배경으로 버려진 나무를 불에 태우고 깎은 뒤 결코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가라앉은 색깔로 수더분하게 붓질을 한 어머니의 초상은 자신을 태우고 깎아내는 우리 어머니들의 희생을 상징하고, 가시방석을 연상시키는 듯 뾰족한 철침과 위태롭게 네 발로 서 있는 의자는 과거와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위기와 불안정을 느끼게 한다.

작자미상 [석조보살입상(石造菩薩立像)]
신라 644년, 고 90.8㎝,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이 보살상은 원래 경주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에 있었던 생의사(生義寺)에 봉안되었던 석미륵상의 협시보살상이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왕(善德王) 때인 644년에 이 석미륵삼존을 봉안하기 위해 생의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고, 경덕왕(景德王) 때에는 향가(鄕歌)를 잘 짓기로 유명하였던 충담(忠談) 스님이 중삼(重三, 3월 3일)과 중구(重九, 9월 9일)에 차를 다려 삼화령의 석미륵에 공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이후 이들 미륵삼존상에 대한 기록이 없다가, 1925년 마을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어 경주박물관에 이안되면서 비로소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본존 미륵불상과 두 협시보살상이 비록 따로따로 수습되었지만, 곧 삼존상으로 추정되어 복원되었고, 이후 이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던 생의사의 석미륵삼존상임이 밝혀지기에 이르렀다.
본 보살상과 또 다른 하나의 보살상은 전체의 형태를 비롯하여 손의 모습이나 서 있는 모습 무릎을 구부려 앞으로 내민 모습 등이 대칭되기 때문에, 미륵불상의 협시보살로 생각된다. 상에 두광배가 함께 조각되어 있으나 대좌는 원형(原形)이 아니다. 자그마한 체구에 아기처럼 귀여운 얼굴로 세칭 '아기부처'로 유명하다.

윤효중 [물동이를 인 여인]
1940년, 나무, 125×48×48cm, 호암미술관
선구적인 근대조각가 김복진의 제자인 불재(弗齋) 윤효중(尹孝重)은 경기도 장단 출신으로 동경미술학교 목조과를 졸업(1941)하였다. 1940년 일본에서 열린 ‘기원 2000년 봉축전’에 <정류(靜流)>로 입선하고, 선전에는 <대지> 등이 입선을 하였으며 <천인침>(1943), <현명(弦鳴)>(1944)이 특선을 했다. 1946년 조선조각협회 창립회원이 되었고, 1949년 홍익대학교 조소과 창설과 더불어 부교수 겸 조각과장이 되었다. 조각가로서보다는 대한미협 부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미술행정가와 교육자로서 더 많은 기여를 하였다. 초기에는 사실성에 입각한 목조인체상을 주로 다루었으며 50년대 이후부터는 국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작가로서의 활동보다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상 등 기념조각에 치중하였다. 그는 토속적인 내용들을 정확한 비례와 역동적인 운동감, 세련된 기술이라는 근대적인 형식 속에 결합하였다. <물동이를 인 여인>은 제19회 선전 출품작으로 물동이를 이고 가는 전통 한국여인의 모습을 소재로 한 향토주의 계열의 작품이다. 억세 보이는 팔을 걷어 부치고 물동이를 인 채 한발을 내딛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현실 인물의 생동감이 느껴진다. 능숙한 목조 기술이 잘 구사되어 있는 사실적인 작품이면서도 표면에 칼자국을 그대로 남겨 표현적인 맛을 더해 주고 있는데, 이런 기법은 <현명>(1944)에서도 잘 나타난다. 일본 유학시절 익힌 목조의 거친 표면효과는 토속적인 느낌과 함께 회화적인 효과를 준다. 조각이라기보다 목조 공예의 느낌을 주지만 한국 여인의 조용한 듯 하면서도 강인하고 부지런한 품성을 한껏 보여준다.

권진규, [지원의 얼굴]
1967년, 테라코타, 48.5×34.9×29cm, 호암미술관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권진규(權鎭圭)는 동경 무사시노(武藏野) 미술학교에서 부르델의 제자였던 시미즈 다카시(淸水多嘉示)에게 사사하여 그에게 건축물을 구축하는 듯한 표현법을 전수받았다. 1959년에 귀국하여 당시로는 드문 재료인 테라코타 작업에 몰두한 그는 1965년 개인전을 통해 처음으로 작품을 선보였다. 이후부터 주로 여인의 초상을 많이 제작하였으며, 70년대 초에는 십자가상이나 불상 등 종교적 주제를 다루었다. 그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조각계의 냉대와 생활고 등으로 고뇌하다가 1973년 붉은 법의를 걸친 자소상을 제작한 후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러한 극적인 생애로 인해 그는 이중섭과 함께 비운의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60년대 중반부터 상당수의 인물조각을 제작하는데, 자소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여인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는 수많은 실명과 익명의 여성들의 얼굴을 통해 초상조각의 사실성을 뛰어넘어 영원한 이상형을 찾고자 하였다. <지원의 얼굴>은 이 시기의 대표작 중 하나로 홍익대학교에 강사로 출강하던 시절 장지원이라는 학생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비구니>나 <여인흉상> 등 그의 다른 초상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목을 길게 늘여 약간 기울인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포착하였다. 특히 테라코타의 독특한 질감과 장식이 배제된 단순한 의상은 금욕적이며,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여인의 시선에서는 고요한 침묵과 동양적 관조가 느껴진다.

최종태[사유소녀상]
1977년, 철, 73×31×18cm, 호암미술관
1932년 대전에서 태어난 최종태(崔鍾泰)는 대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 1954년 뒤늦게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만학으로 조각을 공부하였다. 1960년 <서 있는 여인>으로 국전에서 문공부 장관상을 수상한 이후 추천작가로 작품을 출품하여 본격적인 작가활동을 시작해 왔다. 이화여대를 거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오랫동안 재직하였다. 주로 인체를 모티브로 삼고 있는 그의 작품의 대표적인 특징은 종교적 감성의 조형적 구현과 단순화시킨 형태미의 추구이다. <사유소녀상>은 두 사람의 몸과 마음을 하나로 모아 간절한 소망을 이루고자 하는 구도자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다. 삼국시대의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의 영향을 찾을 수 있고, 또한 단순한 형태미를 극대화하여 형상화한 이 작품의 나란히 서 있는 인물의 얼굴과 가슴, 몸체는 입방체의 기하학적 형태로 단순하게 구축되어 있고 얼굴의 눈, 코, 입과 두 손의 표현은 지극히 절제된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자미상[여인형토우(女人形土偶)]
통일신라 8∼9세기, 고 16.5㎝,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경주 황성동(隍城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돌방무덤(石室墓)에서 출토된 토우이 다. 석실분은 바닥지름이 14미터에 이르는 크기이며 유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출토유물로는 인물용(人物俑), 동물용(動物俑), 수레바퀴, 두침(頭枕), 족좌(足座) 등이 있는데, 당시 사람들의 얼굴모습이나 의복 그리고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이 여인상은 그 중에서도 완형을 가장 잘 남겨주고 있는 작례로서, 같이 출토된 소와 마차, 노인 등과 함께 수로부인(水路夫人)의 주인공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가냘픈 몸매에 얼굴은 살짝 오른쪽으로 돌렸으며, 살며시 든 왼손으로는 웃음기 어린 수줍은 입을 가리고 있다. 오른손은 가만히 내려 물병을 잡았고, 손은 옷소매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다. 길게 늘어진 옷에는 다소 번잡하게 보이는 옷주름이 음각되어 있는데, 얇고 예리한 각선과 굵고 부드러운 각선이 서로 조화되어 있다. 치마는 길게 늘어져 바닥에 닿았는데, 두 발이 살짝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작자미상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신라, 7세기초, 고 31.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여래상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움직임이 큰 자세를 갖고 있는 독특한 불상이다. 머리가 크고 몸은 짧아 어린이같은 신체구성을 갖고 있으며, 엉덩이를 오른쪽으로 쑥 내밀어 오른쪽 발이 약간 위로 올려지게 하였으며, 허리에서 다시 상체를 오른쪽으로 틀어 올려 가슴에서 머리까지는 수직립하도록 하였다. 오른팔은 슬그머니 내려 상체와 엉덩이 사이의 빈 공간을 효과적으로 메워주었고 손에는 연봉오리를 들고 있다. 왼손은 올려 시무외인을 지었다. 꺽여진 엉덩이와 상체를 따라 편단우견의 대의(大衣)가 효과적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조용히 수하한 상의(裳衣)와 달리 바람에 휘날리는 듯한 운동감을 강조하고 있다. 머리는 매우 큰 편이며 나발의 머리 위에는 밋밋하고 큰 육계가 자리하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발견되지 않아, 신라에서만 특이하게 발전하였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 이러한 도상의 불상은 황룡사(皇龍寺)와 숙수사지(宿水寺址) 등 신라에서는 다수 발견된 예가 있다.

작자미상[목조주악비천상(木造奏樂飛天像)]
조선, 18∼19세기, 40.0×63.0, 35.0×56.0㎝, 호암미술관 소장
불상의 위쪽에 위치하는 천개(天蓋)의 내부 천장에는 용이나 화염, 보주, 극락조 등 다양한 조각들이 장식된다. 그리고 천개의 주위에는 이 목조주악비천상과 같은 비천상이 천장에 매달려 장식되며, 이러한 화려한 조각들은 불전(佛殿)의 내부 공간에 극적인 효과를 연출하게 된다. 이 목조주악비천상은 각기 당비파(唐琵琶)와 피리를 연주하는 모습이며 천의(天衣)를 길게 늘어뜨리며 비스듬히 내려오는 형태로 표현되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비천상의 모습과 같다. 각각 하나의 목재를 조각하여 만들었지만 모자 등 일부는 따로 제작하여 못으로 고정하였고, 뒷면의 상단에는 이 비천상을 매달기 위한 고리가 달려 있다.

강관욱(1948~)[구원 85-10]
1985년, 오석(烏石), 37×30×4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강관욱(姜寬旭)은 전북 군산 출신으로 홍익대학교 조소과에서 전뢰진의 지도를 받았고, 국전에 연 3회 특선하여 1980년 국전 추천작가가 되기도 하였다. 1991년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전남대 교수직을 버리고 현재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구상조각에서 그는 치밀한 인물묘사를 보여주어 새로운 리얼리즘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그는 돌을 깨고 깎아 다듬어서 삶의 의의를 찾는 석공과 같이 천직에 대한 자부심과 성실함으로 일관된 작업을 해 오고 있다. 주로 정을 쪼아서 작품을 제작하는 그는 엄청난 작가의 노동을 담보로 평화와 온화함, 관용과 화해의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할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서 속에 깊숙이 잠재된 모성 회귀본능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속에서 한국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찾아내려고 한다. <구원 85-10>은 세월의 풍상에 초라하게 늙어 버린 노파의 모습을 매우 정직하고 사실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름이 깊게 패이고 수심이 가득한 얼굴에는 달관의 경지와도 같은 무심함이 흐르고 있으며, 턱을 괴고 있는 할머니의 손과 표정은 한 여인의 인생을 반영하고 있다. 평범한 어머니로서 한 여성이 겪어야 했던 삶의 고난이 아로새겨진 그 얼굴과 손을 통해 모성의 영원성을 구원의 상징으로 제시한다. 그 속에는 인내와 포용의 너그러움이 깃들여 있으며 더 나아가 모성을 통해 영구불멸하는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작가의 의지가 엿보인다.

백남준(1932~) [장영실(蔣英實)의 꿈]
1970년대, 혼합 매체, 269×124×52cm, 개인 소장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인 백남준(白南準)은 서울에서 태어나 동경대학과 뮌헨대학을 졸업하였다. 현대 음악 작곡가에서 출발하여 행위예술가로 활동하던 그는 일찌기 비디오아트의 가능성을 발견하여 비디오 작가로 변모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의 예술의 깊이와 넓이는 동서양의 역사 및 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예술과 결합시키는 과학적 탐구자세 등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1960년대 유럽, 미국 등지에서 전위적인 행위예술 그룹인 플럭서스(Fluxus)의 중심회원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음악을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유도하여 음악에 비디오 테크닉 등 다양한 기법을 혼합함으로써 과학적 테크놀로지를 인간의 감성과 연결시켰고 또한 다른 많은 작품을 통해 동양적 사유의 공간을 연출하였다. <장영실의 꿈>은 조선시대 세종 때의 과학자인 장영실을 모델로 그의 발명정신과 현대 최첨단 과학 문명과의 만남을 시도한 비디오 조각작품이다. TV 모니터로 구성된 인체 표현에서 빠르게 반복되는 새로운 이미지 연출은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해주고, 우주를 향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는 한 과학자의 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자미상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통일신라 8세기, 고 17.0㎝, 호암미술관 소장
오른손은 손가락을 약간 굽힌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짓고, 왼손은 앞으로 내밀어 긴 병을 들고 있는 여래상이다. 머리의 뒷면에 구멍이 있고, 등 뒤에는 광배(光背)를 꽂았던 장부가 남아 있으며, 두 발 밑에도 대좌(臺座)에 꽂는데 쓰였던 장부가 남아 있다. 나발(螺髮)의 머리는 알맞게 솟아올랐고 이마는 적당하며, 음각된 두 눈과 눈썹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오목한 입 주위는 알맞은 양감을 드러내고 있다. 두 눈과 입 그리고 적당히 부풀어오른 뺨과 턱에서 배어나오는 은은한 미소는 동시대 불상 가운데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우아한 선을 그리며 흘러내린 통견(通肩)의 가사(袈裟)는 힘차면서도 정돈되어 있다. 은은한 금색에 잔잔한 미소,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조각도(彫刻刀)의 손길이 느껴지는 옷주름이 어울려 신비로운 부처의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청자진사채연화문표형주자](靑磁辰砂彩蓮華文瓢形注子)
고려 13세기, 고 32.5,동경 16.8, 저경 11.2㎝, 국보 113호, 호암미술관 소장
고려시대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최고 실력자였던 최항(崔沆, ?∼1257, 崔忠獻의 孫子)의 묘지석(墓誌石)과 함께 강화도에서 출토된 주전자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전체적으로는 표주박 모양이지만, 몸체의 위와 아래 부분은 크고 작은 연꽃 봉오리가 중첩되어 있는 모습이며 주구(注口)도 연잎을 길게 말은 형태이다. 손잡이의 위쪽에는 튀어 오를 듯 생동감이 넘치는 작은 개구리 모양의 고리장식을 하여 마치 연꽃이 핀 연못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특히, 연꽃이 중첩되는 잘록한 목 부분에는 동자가 작은 연봉오리를 끌어 안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의 조각이 있어, 고요한 연못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고 있다. 표면에는 연꽃잎을 양각한 후 음각으로 잎의 줄기를 묘사하고, 그 위에 흰 점을 찍어 무늬를 강조하는 퇴화(堆畵)장식을 하였으며, 잎의 가장자리에는 붉은 빛의 진사안료(辰砂顔料)를 칠하여 차분하고도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표면에는 광택이 좋고 투명한 담록색의 유약을 씌웠으며, 바닥에는 적갈색 내화토를 받쳐 번조한 흔적이 남아 있다. 고려의 국교(國敎)였던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을 소재로 다양한 장식기법을 조화시킨 작품으로, 호화로움과 고려인의 창의성이 단연 돋보이는 명품이다.

[목조동자상(木造童子像)]
조선 18∼19세기, 고 68.5㎝,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머리 위에 두 군데에 머리를 묶어 총각(總角)하여 동자상임을 나타내었다. 두 손에는 연잎 위에 꽃 등을 담은 공양물을 들고 있는데, 아마 불전에 공양하는 모습을 조각한 것으로 생각된다. 동자상은 지장전(地藏殿)이나 명부전(冥府殿) 등에서 시왕의 수하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얼굴은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조각되었는데, 흔히 이마와 콧등이 한 평면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경우가 많음에 반해, 이 동자상에서는 두 눈과 코 부분이 별도의 평면으로 처리되어 더욱 입체적으로 보이게 한다. 얼굴은 약간 오른쪽을 바라보도록 하였고, 무릎은 약간 구부렸으며, 천의자락은 몸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동세가 매우 강하게 보인다. 대부분의 동자들처럼 입을 약간 벌리고 중앙의 윗니 두 개를 보이도록 하였다.

이중섭 [바닷가의 아이들]
1951년 무렵, 캔버스에 유채, 36×27cm, 개인소장
평남 평원에서 태어난 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은 40살의 나이에 요절한 비극적인 생애의 화가였다.오산고등학교 재학 당시 미국에서 귀국한 임용련(任用璉 1901∼?) 의 지도를 받아 미술에 입문하게 되었다. 일본제국미술학교에서 수학(1934)을 하고 다시 문화학교 미술과에 재학(1935∼1940)하여 서구 모더니즘 미술을 토대로 한 자유로운 미술수업을 받았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하여 원산에서 생활하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남하하여 처참한 피난생활을 한 그는 가족을 일본으로 보낸 후 고독과 자학 속에 정신분열증세까지 보였다. 그의 화풍은 초기에는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향토적인 주제를 다루었으나, 점차 가족과의 사랑과 이별 등 자신의 신변과 관련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야수파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바닷가의 아이들>은 이중섭이 가족과 함께 서귀포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시기의 작품으로 줄을 이용해 대상들을 서로 긴밀하게 연관 지은 연출이 돋보인다. 네 명의 아이들이 물고기와 게를 잡으려고 서로 얽혀 있는 모습을 안정적인 구도 속에서 율동감 넘치는 자세와 선이 만들어내는 동적인 느낌을 첨가하여 활기차게 표현하고 있다. 한가지 색으로 배경화면을 칠하고 거친 붓으로 자연스럽게 테를 둘러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피난생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삶의 즐거움, 희망, 기쁨 등을 물고기와 어우러져 노는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의 세계에서 찾아내고 있다.

장욱진 [산, 호랑이, 아이]
1980, 캔버스에 유채, 46.8×37.9cm, 개인소장
충남 연기 출신인 장욱진(張旭鎭)은 일본 동경제국미술학교를 졸업(1944)하였다. 해방 후 한 때 국립박물관(1945~1947)과 서울대 미대(1954~1960)에 재직한 이외에는 줄곧 창작생활에만 몰두해 왔다.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과 신사실파 동인으로 활동(1947~48)하였고 앙가쥬망전(1970) 등에 참여해 왔다. 30호 미만의 작은 화면에 나무, 집, 새, 어린이, 마을, 가족 등을 주 모티브로 하여 자신과 주변의 일상적인 이미지를 소박하고 정감있는 어린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눈으로 관찰하여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절대적 정신의 자유를 표현하였다. 주로 간결한 선과 요약된 형태로 인생을 관조하듯 순수한 시정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산, 호랑이, 아이>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와 향토적인 서정성이 짙게 풍기는 동화같은 작품이다. 화면을 상하로 이등분하여 위에는 일월오악도를 연상케하는 해와 달, 산을, 아래쪽에는 호랑이, 까치, 아이를 그려 넣었다. 고구려 벽화나 민화에서 보이는 산등성이의 표현이나 호랑이, 까치 등의 전통적인 소재가 토속적인 소박한 정서를 불러 일으키고 동심의 세계처럼 순진무구하며 자유스러운 정신의 원초성을 있는 그대로 느끼게 한다. 일정한 외곽선 없이 이루어진 형상과 바랜 듯 닦아낸 채색효과가 푸근하고 친근감을 더한다.
출처 : 로댕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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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10:00 - 18:00
토요일 10:00 - 18:00
일요일 10:00 - 18:00
휴관: 월요일
관람료 유료
모든 프로그램은 주최측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를 확인하시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