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창창작스튜디오
2015년 8월 7일 ~ 2015년 8월 19일

결합과 해체의 어느 중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미국 만화 주인공들 가운데 스칼렛 위치(Scarlet Witch)라는 슈퍼 히로인이 있다. 완다 막시모프라는 본명을 가진 그녀는 <엑스맨>이나 <어벤져스>에 잘 등장한다. 영화에서 보여준 스칼렛 위치의 능력은 만화책보다 훨씬 아랫급으로 묘사되어서 실망이다. 원작 만화책에서 그녀가 가진 가장 큰 힘은 헥사(Hexes)라고 불리는 초능력이다. 이게 뭔가 하면, 우리 세계를 정육면체 덩어리로 잘게 쪼개어 현실을 바꿔버리는 마술이다. 이 앞에선 토르의 망치도, 아이언맨의 광선도 무용지물이 되는데, 이런 연유로 스칼렛 위치는 영웅과 악당 역할을 오고 간다. 세계를 창조하고 파괴하는 힘은 신화나 그래픽 노블 속 주인공들만 가지는 게 아니라, 예술가들에게도 비슷한 특권이 주어진다. 조각가 임도훈의 작업은 대상을 자잘한 단자로 나누거나 혹은 뭉치는 과정을 표현한다.
이런 구성적 세계 안에서 기본 단위는 베어링이다. 공업용 쇠구슬의 원 쓰임새는 윤활유 범벅이 되어서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기계장치의 마모를 줄이거나 운동에너지를 지키는 구실이다. 그런데 임도훈의 조각에서 그것은 기름 대신 접착제나 용접으로 붙어서 형상을 재현하는 낱개가 된다. 말하자면 이건 장난감 블록과 같은 셈이다. 본래는 물체의 운동을 꾀하던 용도가 제 스스로 고정되고 결합되는 쪽으로 전환된다. 현상 속에서의 결합은 베어링들이 맞붙은 상태다. 하지만 작가의 인식 속에서는 기술과 관념의 결합이 이루어진다. 그가 바라는 바는 자신의 조형적 재능을 조각 예술 이전의 총체적인 지식에 기대어 보여주는 일이다. 작가는 별처럼 광채 어린 금속 구슬을 통해, 생명 현상의 숱한 면을 이야기로 풀어내고자 한다.
내 생각으로는 이럴 경우에 이야기는 단순할수록 좋다. 그러나 많은 예술가들은 이야기의 단순함을 사람들이 미숙련 내지 유아적 취향으로 오해할까봐 적잖이 신경 쓴다. 그 와중에 작업 주제는 전혀 엉뚱한 논쟁에 빠져들거나 지적 허세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으며 애초에 가진 손재주까지 덩달아 폄하되는 경우가 많다. 그처럼 옳지 못한 일을 종종 관찰해 온 나로서는 임도훈의 미적 세계가 거꾸로 천진난만한 비유의 어법처럼 나아가야 된다고 본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펼쳐놓은 알레고리들은 한 가지 대상을 비교적 뚜렷한 주제 아래에서 통제 받는다. 지금으로부터 삼년 전에 네 발 달린 짐승들을 조각한 <불안한 행복> 연작이 그랬고, 최근에 <낭만전쟁>이라는 표제 하에 시도하는 작품도 그렇다.
돌이켜보면, 작가의 설명과는 별개 차원에서 <불안한 행복>은 삶의 터전을 점점 잃어가는 야생 동물의 상황을 의인화된 요소를 결합시킨 역설로 풀어낸 작업이었다. 이는 현대인들에 대한 직접적인 비유인데, 다분히 작가 본인의 자화상으로 해석되는 부분도 있다. 신작 <낭만전쟁>은 전작에 비하여 몇 가지 달라진 면이 있다. 우선 베어링이 철에서 스테인리스 재질로 바뀌어 보존성을 보장받게 되었으며, 자신의 스승이 제시한 세계관으로부터 독립된 관점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중요한 점. 새로운 작업은 재현되는 대상이 주체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서 객체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게 좋은지 나쁜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자신을 동물에 비추어 담아내던 이전의 방법과 달리, <낭만전쟁>은 무기류를 내세우면서 전작이 품었던 야생성을 한 층 더 위험과 매혹이 공존하는 대상으로 낯설게 바꿔놓았다. 이 점에 비하면 기법의 개선, 예컨대 동물 형태의 본을 뜰 때에 흙을 쓰던 방식이 전차나 소총의 형태를 잡기 위해 종이를 쓰는 식으로 바뀐 부분은 차라리 부차적인 혁신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의 탐구는 생태 친화적 생활이나 반전 운동과 같은 상투성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과정이 요구되는 작업은 일단 즉물적인 형상을 머릿속으로 그려놓고 많은 부분을 미완성처럼 남겨놓는 일과 결합된다. 비록 완전한 재현이 아닐지라도 관객은 작품의 빈 공간을 자신의 인지 속에서 완성시키며, 그 불완전성에 균형을 맞춘다. 뭐, 그렇다고 이런 조형성을 ‘비워냄의 미학’ 따위의 말로 미화하지는 말자. 회화에서도 그림 위에 덧칠을 통해 선행 과정을 덜어내는 일이 허다하지 않나. 중요한 점은 대상을 식별할 수 있는 선에서 얼마나 적절하게 구슬을 덜 채울 것인지에 관해서 작가가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나는 베어링이라는 소재를 더 주목한다. 왜 유리구슬이나 성냥개비나 주사위가 아니라 공업용 쇠구슬이어야만 하나? 작가가 다른 재료에 관한 사심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 이 시점에서, 베어링은 완성을 보증해주는 재료가 맞다. 조각 예술의 중심으로부터 한참 소외되어 왔던 이 물건은 그의 손을 거치며 전체를 갖추기 위하여 강박적으로 대형을 유지해야하는 결속력을 가진다. 또한 이것은 그 자체는 작은 알갱이지만 자신으로부터 거의 모든 것으로 뻗어나갈 여지를 품으며, 때로는 부분을 생략함으로서 실재를 더욱 보증하는 변형의 즐거움까지 준다. 조각이 이 세계를 관찰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면, 작가가 형상을 뚝딱 만들어내는 숙련뿐만 아니라 본질을 적절히 숨기고 거짓으로 드러내는 수단까지 기획할 필요를 깨달은 시점은 이미 훨씬 전이다.
물론 여기에 또 다른 의미 부여가 하나의 알레고리처럼 끼어들 가능성은 있다. 내가 보기에, 작가도 그 점을 은근히 바란다. 그런데 좀 위험하다. 구슬처럼 둥근 형태는 유기체를 닮았으며, 단자의 결합 방식은 핵 염기가 단백질 합성체와 결합한 DNA 이중나선 구조의 시각적 은유와 통하는 부분도 있다. 이처럼 전체가 통합된 시각은 저마다의 구슬이 서로를 비춰주는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까지 이어진다. 적지 않은 미술 담론은 인드라 망을 통해 작품을 과대 조망하는 오류를 범해왔으며, 이와는 별도로 1990년대에 서구 미학에서 생물 분자가 가진 조형적 아름다움에 관한 분석이 활발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러한 판에 임도훈 작가까지 합세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오직 문제는 그가 선택한 작업이 그런 간판들 아래에 너무나 잘 들어맞는다는 특성뿐이다. 단조로움이 변화무쌍함을 이끌고, 낱낱의 가벼움이 양감어린 조소 작품으로 탈바꿈하고, 차가운 쇠 알갱이들이 우리가 직시하고자 하는 조각가의 발언으로부터 예술의 온갖 유사(quasi) 담론까지 이야깃거리로 녹이는 뜨거움이 임도훈의 작품 속에 있다. 확실히, 이 점이 이 젊은 조각가가 가진 특별한 능력이기는 하다. 윤규홍 (갤러리 분도 아트 디렉터 / 예술사회학)
출처 - 가창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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