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크갤러리
2015년 11월 5일 ~ 2015년 12월 1일
화가의 자궁-번식 캔버스에유화 193.9×259.1cm 200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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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수의 ‘손-자궁’
70년대 후반부터 ‘기괴한’ 혹은 ‘기이한’ 몸을 그려왔던 정복수는 최근 매우 다른 몸을 그리고 있다. 보는 이들을 당혹하게 만들던 그의 저 ‘벌거벗은 신체’들은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운 형태로 자족하고 있다. ‘보기에 좋구나, 더불어 노닐고 싶다’ 웅얼거릴 정도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기관 혹은 부분신체로 종횡무진 날아다니거나, 종으로서의 인간 증식을 위해 외롭고 숙명적인 계열체의 한 사슬로 존재하던 이 신체들은 이제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뱀들과 교감하며 부드럽게 유영하고 있다. 어떤 첫 탄생의 순결과 평화, 온유함이 은은하게 번진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 변화가 그렇게 급작스럽거나 이상한 건 또 아니다. 80년대의 소위 ‘검은 그림’을 거쳐 90년대에 그가 끊임없는 변주로 그려 보인 신체들을 떠올려보자. 입/혀에서 성기로, 입/혀에서 항문으로, 또는 입/혀에서 발로 이어지는 내선들만으로 이루어진 그의 기관 없는 신체-인간들은(bodies without organs) 즉물적이고 원초적인 동물성이나 최소한도로 축소된 사회성을 가리키기보다는 오히려 유기체로 이해되는 신체 ‘너머’, 그 신체를 특정 방식으로 조립하고 규정하는 이데올로기적 사유 ‘너머’의 해방과 자유를 증명한다.
그가 그린 무수한 부분 신체들은 또 어떠한가. 평자들은 부분신체로 존재하는 그의 인간 이미지들을 주로 ‘절단’이라는 말로 포착했지만, 절단의 부정성보다는 오히려 ‘분절’의 해방과 향락(jouissance)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꽤나 많았다. 그렇다, 예를 들어 ♀(vagina)를 찾아서 홀로 붕붕 날아다니는 ♂(penis)는 흥미롭게도 페니스 파시즘의 경쾌한 자기 조롱이고 자기 해체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는 전체주의적 폭력과 억압의 남근이성중심주의(phallogocentrism)를 짊어질 수 없으며, 그와 짝을 이루는 ♀ 또한 모멸을 견디는 수동적인 신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분절된 팔이나 목에서 내뿜어지는 저 힘찬 줄기는, 사람들이 말하듯 절단과 훼손의 핏줄기가 아니라 해방의 내파(implosion)가 진행 중임을 알리는 에너지 줄기다. 하늘로 비상할 때 우주선 꽁무니에서 내뿜어지는 에너지가 연상되는 기운이다. 슝~~ 어디론가 날아간다. 어디로? 안 알랴 주징~~. 이렇게 정복수는 고통스런 종의 규범적 생존 연대기에 장난기 많고 제멋대로인 욕망(desire)의 풍경을 잇댄다. 이제 신체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아예 신체가 된 기억들은 더 이상 일그러진 억압의 풍경으로 정박되길 거부한다. 남근(Phallus)의 폭력적인 권력을 주장하는 ♂(penis)들의 허망한 즉물적 성욕을 폭로하던 80년대의 검은 짐승-신체인간은 90년대에 이르면 이렇듯 서서히 타자를 품고 이야기를 만들어간 시간의 기억으로 전환(transform)된다. 변태(metamorphosis)를 경험한 이 부분신체들 혹은 기관 없는 신체들은 더 이상 제도와 규범의 강제 위에서 자기동일성(self identity)을 구축하는 주체가 아니다.
이러한 변화는 2000년대에 들어와 더 한층 발랄한 기운을 품게 된다. 아마도 이 시기는 화가 정복수가 아버지로서 한껏 기쁨을 누렸던 때가 아니었을까. <인간의 기쁨> 4개, <혀의 추억>, <기쁨의 원형> 4개, <생의 일기>는 그의 그림 전부를 통틀어 가장 밝고 희망에 차 있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이 이미지들에서 이빨은 물어뜯기 위함이 아니고, 혀는 독설을 내뿜기 위함이 아니다. 길게 입 밖으로 뻗어 나와 날름거리는 붉은 혀는 기쁨을 노래하기 위해 저 스스로 소리를 내는 풀피리 같다. 몸통도 팔도 없지만 그 부분 신체로 이 인간들은 웃음 속에서 행복 하느라 여념이 없다. 혀들은 상대방을 향해 쏘아댄 폭력적 판단의 독화살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가능케 했던 사랑의 밀어를 추억하고 노래한다. 이렇게 그의 신체 이미지는 달달한 느낌을 담으며 다양한 몸과 마음의 지도, 존재의 구조, 인생의 일기를 펼친다. 일관되게 더 밝고 더 긍정적이며 더 아름다운 삶을 향해 전진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러나 그의 인간들은 암컷을 향해 달려드는 수컷에서, 단지 수컷 또는 단지 암컷에서, 뉘앙스가 있는 동물-사람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동물 되기이기도 했던 기관 없는 신체 되기의 유쾌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인간들은 밝고 은은하고 평화로운 기운 속에서 뱀과 함께 어떤 시작을 알리고 있다. 뱀은 신화와 종교, 그리고 정신분석의 세계에서 지혜와 사악함, 즉 선악의 분별과 그것에 따른 판단, 부활과 치유, 그리고 여성의 ‘유혹하는’ 섹슈얼리티와 남성의 ‘욕망하는’ 섹슈얼리티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정복수의 최근 이미지에서 인간과 노닐며 대화를 나누는 저 뱀들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아니다, 정복수의 뱀은 무엇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무엇이다. 정복수가 이제까지 보여준 신체 그림에서 입/혀에서 성기로, 입/혀에서 항문으로, 또는 입/혀에서 발로 이어지는 내선들은 저 모든 의미로서의 뱀이었다.
성적 존재와 생물학적 존재, 그리고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가리켰던 저 내선들은 모두 뱀의 속성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이 뱀이 밖으로 나온 것이다. 첫 생성과 창조의 시공간을 연상시키는 그림에서 보살을 닮은 사람이 뱀과, 뱀이 뱀과 이야기를 나누며 유유자적 공존한다. 기관 없는 신체 또는 부분 신체를 지나 이제 아예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없어진, 내부를 외부로 지닌 신체가 등장한 것이다. 이전의 이미지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에덴동산의 첫 인간을 볼 것이다. 아직 뱀의 유혹에 빠지기 전, 그러니까 선악을 구별해야 하는 두렵고도 위험천만한 운명으로 미끄러지기 전 첫 인간의 평화롭고 천진난만한 세계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간의 작업 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지난한 산고 끝에 나온 형상인지 이해하리라. 이것은 새로운 말 걸기다. 다시 시작해보자는 것이다. 폭력 아닌 말 걸기로, 사악한 판단 아닌 지혜로운 인식으로,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상서로운 잇기로 새롭게 탄생시켜 보자는 것이다. 무엇을? 그건 중요하지 않다. 유기체적 신체-삶의 ‘목표’는 이미 버린 지 오래고, ‘목적’은 여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온유하고 부드러운 ‘날름거림’으로 진행되는 이 탄생의 순간 순간이 어떤 경이로운 미의 세계로 우리를 데려갈지, 정복수의 ‘손-자궁’이 어떤 형상들로 또 어떤 인생의 일기를 써나갈지 궁금하다. 날름거리는 혀, 그 기묘한 혀의 속삭임이 궁금하다. / 김영옥 (이미지 비평가, 여성학자)

뱀과 남자 판넬에 색연필 30.5×40.5cm 2012

뱀과의 하루 캔버스에 유화 60.6x72x7cm 20호 2014

춤을 추는 조건 판넬에 색연필 40.6×30.5cm 2012

뱀과의 하루 캔버스에 유화 91×116.8cm 50호 2011
출처 - 트렁크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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