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정의 산수(山水)는 한지를 태워 형상을 갖춰 나간다.
산(山)과 태움은 그에게 불가분의 이야기이다. 산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잦은 제사에 향불을 사르던 어머니 사이에서 나란히 큰 자매지간인 셈이다.
향불에 타고 그을린 한지의 윤곽과 색상은 말 그대로 각양각색. 그것들이 얽히고설켜 산세를 엮는다. 반투명한 속내를 주고받으며 희미한 외곽을 첩첩 포개 깊이를 쌓는다.
현대 동양화의 활로는 참으로 다종다양한 진보와 혁신으로 모색된다. 그 중에서도 정희정은 자못 도전적이다.
동양 회화에서 지필묵은 불가분의 수단으로 지위가 공고하다. 여느 화구가 그러하듯 종이의 여백을 채우며 형상을 입혀 간다. ‘정신성의 계승’과 ‘수양의 자세’라는 상징성을 덧쌓겠지만, ‘필묵→종이’, ‘빔(空虛)→참(充滿)’으로 흐르는 방향성은 여전하다.
그러나 정희정은 ‘태워서’ 이를 거스른다. 태움이란 기본적으로 소멸의 과정이며 무얼 채운다기보다 비움과 궤(軌)를 같이한다. 또한 종이에 무언가 칠해 형상을 얻는 대신, 탄 종이가 화폭에 그대로 들어앉아 형상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 회화에서의 종이의 주도성을 부각한다.
이 점에서 ‘역리(逆理)의 산수’라는 헤아림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산수’가 선택이 개입하지 않아도 이미 주어진 대상, 인간에 불가분인 ‘자연’을 향한다면, 그 골자에 접근하는 방법인 ‘태움’ 역시 인위적이라기보다 일종의 자연 현상의 활용으로 볼 수 있다.
종이가 타며 선(線)을 낳는다. 태움은 비움과 소멸의 장단이건만 역설적이게도 그 태움의 거듭제곱에 형상이 나고 큰다. 마치 음수에 음수를 겹쳐 자연스레 양수로 탈바꿈하듯. 관점에 따라선 역리가 아니라 오히려 보다 더한 순리(順理), 순리 중의 순리일 수 있다.
그의 초기 작업은 익히 알려진 도상의 방작 형태로 종종 보이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점차 자신만의 실경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특히 실경의 정석적인 답습을 벗어나 자신만의 방식 즉 태움을 거듭하며 중요한 산세를 솎는다. 산의 자잘한 표면을 버림으로 기운이 강성한 산줄기가 두드러진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산을 산답게 만드는 큰 맥과 뼈대이다. <골산(骨山)>이라 부를 만하다.
사족은 버리고 자연의 의취, 골자를 남긴다. 그래서 그의 태움은 증류와 정제의 과정이며 그렇게 걸러낸 산수는 어느 산수보다 순도 높은 산수라 하겠다. 굳이 남제(南齊) 사혁(謝赫)의 화육법(畵六法)을 빌리자면 응물상형(應物象形)보단 경영위치(經營位置)에 무게를 두고 산세 하나까지 고르고 추린 자신만의 산수인 셈이다.

Peakcape_장지에 화선지 꼴라쥬, 채색, 향, 라이터_116×91㎝_2015
Burning of ridge_장지, 라이터_각 75×22×15㎝_2015 (부분)
Burning of ridge_장지, 라이터_각 75×22×15㎝_2015 (부분)
骨山-어떤 풍경_장지에 화선지 꼴라쥬, 먹, 향, 라이터_각 60×145㎝_2015.TIF
출처 - OCI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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