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
2025년 9월 11일 ~ 2025년 9월 22일
회화의 시간,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은
들어가며
시간이 우리를, 예술가들을 사로잡는 것, 아니 우리가 시간에 포획되는 것은 매력적이다. 흥미롭고 마술적인 비전과 이미지가 회화 예술의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회화 이미지와 만나 시간은 그 영원할 것 같은 운동을 멈춘다. 우리가 배워왔던 예술의 준칙은 형식과 내용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현실에서 도달하기에 너무도 높은 목표이다. 예술가들은 그곳에 도달하는 도중에 자신의 예술사를 기록하고 종료한다.
미술 현장, 또는 현장 미술이라는 말이 한때 유행했다. 미술계나 미술판이란 말 보다는 뭔가 지적이고 비평적 개념이 들어간 인상이다. 길거리에서 시민운동,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이 성장하던 시기에 미술계에서 자주 사용된 용어이다. 현장은 현장성, 당대성, 지금 바로 여기라는 실존적 뉘앙스를 품고 있으며 당대의 세계관과 인간관, 예술관, 생활의 태도가 그 안에 녹아 있다.
종근당 예술지상 기획전에서 우리는 국동완, 박미라, 한지형 세 작가의 회화를 통해 현재의 미술 현장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세 작가의 활동과 작품을 통해 한국 현대 회화의 한 가운데에서 새로운 세대의 회화를 만나게 된다. 시대마다 미술문화의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고 표현하고 해석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변해왔다. 종근당 예술지상을 통해 소개해온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한국현대미술의 현장에서 회화가 어떤 모습으로 그리고 어떤 에너지를 갖고 역동적으로 표현되어왔는지 경험했다. 높은 수준의 조형성과 예민한 감각과 감수성, 깊은 통찰과 사유가 작가마다 독특한 개성으로 표현되어왔다. 이들이 창작에 매진하던 시기는 예술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또한 큰 위기와 기회, 새로운 변화가 역동했다. 우리는 작품과 전시를 경험하며 매순간 예술이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어떤 주제의식과 감성을 담아내는지 살펴본다.
국동완
철저하게 개인적이며 자의적인 꿈의 차원과 일상 현실의 경험의 차원이 서로 중첩한다. 회화이미지는 보편적 비전을 지향하지만 그때그때 우연적으로 개인의 운명을 예지하는 꿈처럼 인류의 상처와 고통을 염려하고 돌보는 것이다.
작가는 오랫동안 꿈을 생각하고 대하는 방식에 대해 다양한 작업을 실험한다. 매일매일의 꿈을 언어와 문자, 조형 형식으로 결합해 꿈에 대한 우리의 관습적 인식을 해체하고 새로운 시선에서 재조직하고, 꿈을 기록하는 오브제를 제시해왔다. 작가는 조각에서 오브제와 회화 이미지로 점차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작업의 시작은 언제나 내가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살고 있는가? 자각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후 관찰과 기록과 다양한 사물과 접촉하고 새로운 오브제, 채색, 드로잉을 결합하는 방식을 모색한다. 가정생활과 사회적 관계의 불가피한 관계의 조건 속에서 새로운 조형적 표현을 위한 사유와 실험이 작업 과정에 고스란히 융해되어 들어간다.
이미지로 재현된 예지몽(꿈)은 마치 문학적 상징이나 은유처럼 우리의 정신이 물리적 자연법칙의 밖에서 운동하도록 만든다. 거대한 우주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는 가운데에서 시간은 상대적이며 꿈속이야말로 시간이 자유롭게 운동하는 세계이다. 인간의 감정과 이성도 꿈속에서는 믿을 수 없게 된다. 작가의 푸른 물빛의 ‘청靑’의 이미지는 꿈(예지몽)처럼 현실의 상처와 슬픔을, 보편적 감정의 미시적 변화를 미리 감지하도록 소리없는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
박미라
세계는 어둠 속에 있다. 나무와 인물과 정체불명의 존재와 사건이 개성적인 검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근대 이전의 일상과 현실을 초월하는 꿈과 이미지와 환각, 환영을 경험한다. 강렬하게 실재하는 체험을 통해 불안정한 변화와 죽음의 대기줄을 견디어 낸다. 검은색, 무채색, 회색의 풍경이다. 밤의 세계이다. 작가는 평범한 일상과는 다른 차원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이면을 상상한다. 작가 자신의 분신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작가가 만나는 사람들도 변형되어 다른 존재처럼 등장한다. 한여름 밤의 연극처럼 무표정하며 스산한 분위기가 반복된다.
작가는 처음 큰 벽화 작업에서 출발해 거친 표면 질감에 매료되었다. 이후 검은 이미지에 집중한다. 작가가 경험하는 장소와 이미지의 연속성 속에서 일련의 작품이 제작된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자신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의 연대기를 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호기심, 설렘과 불안, 공포와 두려움 등 감정과 장소가 연결되어있다는데서 출발한다. 장소와 장소, 공간과 공간, 도시와 도시를 미스테리하게 연결한다. 가상과 실재, 현실과 환영이 혼합된다. 미래의 일상은 다른 차원의 실재성으로 가득차 있다.
작가의 대표작 ‘미래의 연대기’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사유한다. 생사의 경계에서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관통하고 가로질러 바로 죽음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질문한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와 이미 종료된 사건과 시간을 되짚어 보는 상상의 ‘연대기’가 개인의 또는 집단의 어두운 운명을 천천히 드러내듯 연출하고 있다.
한지형
우리는 여전히 20세기의 경험과 정신, 문화 속에서 살아간다. 한지형 작가의 작품 속 시대는 21세기가 지나고도 한참 지난 미래의 어느 시점이다. 미래의 사람은 그리 유쾌하지는 않은 것 같다. 디스토피아적 세기말의 우울과 불안의 그림자가 지배하는 시간처럼 보인다. 이 시대를 사는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형태의 진화된 형상으로 표현된다. 외부 환경이 강제한 진화로 변형된 존재, 동물이거나 괴물이거나 아니면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기이한 존재가 되어 있다.
작가의 이미지는 독특하다. 인물과 배경의 경계가 흐릿하고 인물과 인물 사이도 한 존재처럼 음영이 처리되어 있다. 마치 렘브란트의 검은 회화 속 인물들이 그림자 속에 하나의 존재로 연결되는 이미지를 닮았다. 1920~30년대 초기 흑백 애니메이션 속에서 경험한 비현실적 또는 초현실적 인물들, 사건들, 형태들이 미래의 SF적 아포칼립스로 번안되어 보인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1984’, 올더스 헉슬리의 ‘신세계’가 뒤섞인 기괴한 세계에서 인간은 더 이상 우리가 아는 인간의 형상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다. 한지형 작가의 무거운 세계관과 인간이 다른 생물과 융합하는 신체 변형(Body Modification), 변태(Metamorphosis) 등은 어둡지만 흥미로운 주제임에 틀림없다. SF적 상상력이 전통적인 회화 형식과 만나는 기묘한 이미지이다.
나오며
눈이 하나인 사람들의 마을에서 눈이 둘인 한 사람이 겪는 이야기는 익숙한 우화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예언자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예언자가 겪는 고통은 익숙한 서사다. 미리 앞서 보는 자라는 신화는 예술계에 뿌리 깊다. 직관, 통찰, 예감은 미래의 눈과 앎을 현재로 끌어당겨 사용하는 것과 같다.
2025년 종근당 예술지상은 단지 현재만이 아니라 2012년 출범하던 시기 이후 매 시기마다 특별한 경험의 시간과 조형적 모험의 연대기를 기획자들과 작가들이 함께 만들어 왔다. 긴 시간을 염두하지 않는다면, 매사 모든 일이 불안정하고 운에 달린 것으로만 보이게 된다. 왜 선사인들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간 곳에 암각화를 남겼을까. 일종의 타임캡슐처럼 영원성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 더 먼 미래의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 자신들이 겪은 삶과 운명을 전달하고 이해시키기 위한 것은 아닐까?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시대의 공적인 과거와 어떠한 유기적 관계도 가지지 않는 일종의 영구적인 현재 속에서 살아간다. 또 그런 환경에서 성장한 세대는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로 수렴되어 들어온다. 모든 예술적 질문과 해답을 현재성 안에서 해결해야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현실의 중요한 사안과 현상에 대해 그 역사적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경우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망각하고 직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새로운 주제와 표현형식을 모색하는 작가들은 당연하게도 이러한 전환기의 혼란과 무질서의 시기를 반복해서 경험한다. 강물이 바다와 만나면 바로 융합하는 것이 아니다. 아주 긴 길이와 넓은 면과 깊이와 폭과 시간을 통해 담수와 해수가 아주 서서히 하나가 된다. 창의와 경이는 담수와 해수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색과 밀도와 속성이 마구 뒤섞이는 혼돈의 현장에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이상적인 균형을 찾아간다. 우리는 당대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그 개인과 사회, 자연과 문명, 정신과 세계를 읽는다. 공감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종근당 예술지상은 매년 과거를 반복하는 연례행사가 아니라 매순간 살아 숨쉬고 일상과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공감하면서 새로운 인식과 비전을 구상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참여작가: 국동완, 박미라, 한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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