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도스
2018년 11월 28일 ~ 2018년 1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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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분석가로서의 화가_최경아의 근작들
초기작에 해당하는 <41° 50′ 4.75″ N, 87° 37′ 42″ W>(2010), <45° 30′ 0″ N, 73° 32′ 37″ W>(2011)부터 근래의 <35° 52' 31.8288'' N, 128° 35' 4.4196>(2018)에 이르기까지 최경아는 꽤 오랫동안 숫자와 기호들로 채워진 공간의 좌표 값을 작업의 표제로 사용해왔다. 이 작업들은 여행자 또는 산책자의 입장에서 작가가 방문했던 특정 장소들의 이미지와 기억의 단편들을 포괄한다. 즉 작가가 여러 경로(여기에는 인터넷과 SNS도 포함된다)를 통해 수집한 공간의 이미지들과 그 공간에 얽힌 작가 개인의 기억과 감정들이 하나의 회화 면에 중첩됐다. 최경아 자신에 따르면 이 작업들은 “일시적 특정 공간에서 경험한 기억과 시간의 결과물”에 해당한다. 그것을 이 작가는 “불완전한 나의 심리적 공간”(『대구일보』 2017년 11월 19일)이라고 불렀다.
이 작업들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어떤 모순, 곧 <35° 52' 31.8288'' N, 128° 35' 4.4196> 등과 같은 냉담하고 객관적인 표제들과 “불완전한 나의 심리적 공간”에 관한 작가 자신의 주정적 발언 사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 독특한 모순이다. 작업 표제에 나타난 냉담한 좌표 값은 이 작업이 외부에서, 곧 그 좌표가 지시하는 특정 공간-장소의 경험에서 촉발된 것임을 일러준다. 하지만 “불완전한 나의 심리적 공간”이라는 작가의 발언은 이후 그 작업이 내부로부터, 곧 다분히 주관적인 방식으로 진행됐다는 것을 시사한다. 여기에는 외부→내부로의 방향과 내부→외부로의 방향이 중첩되어 있다. 이 작가는 그 공간에서 자신이 경험한 바를 가급적 충실히 화폭에 재현하되 거기에 자신의 주관을,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식으로 표현하면 “감각된 가치, 현실적 가치를 앞지르거나 반박하는 어떤 (비현실적인)가치를”(La terre et les rêveries du repos, Paris: Librairie José Corti, 1948, p.78) 부여하는 식으로 작업했다. 과거에 어떤 비평가는 이 작업들의 안과 밖을 돌아보며 어떤 “원인모를 불편함”을 느꼈는데 그 불편함은 “일률적이고 정확한 틀을 따라 옮겨지는 시선이 무색하게 흐트러지고 뭉개지고 지워진 일부의 일탈 같은 붓질”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비평가는 그것을 “낯선 심리적 흐름”(송의영, 「불완전한 공간」, 『최경아_산책자展』, 성남아트센터, 2017)으로 이해했다.
실제로 공간의 좌표값을 표제로 택한 최경아의 작업들에는 그 공간에 특질을 부여하는 주체-작가의 심리적 개입이 매우 두드러진다. 이로써 회화의 공간 이미지들은 ‘상태’보다는 ‘생성’의 특질을 갖게 됐다. 예컨대 여기서 ‘빨강’은 명사보다는 동사에 가깝다. 즉 빨간색은 주관적 인상들로 채워진 몽상의 무게에 따라 짙어지거나 연해졌다. 어느 순간 그것은 마침내 투명해져서 다른 색과 겹쳐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작업할 경우 이미지는 불완전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것은 “너무 지나치다”는 느낌과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 사이에서 동요(진동)하기 마련이다. 다시금 바슐라르를 인용하면 ‘충분하지 않게’와 ‘지나치게’ 사이에서 하나의 이미지는 결코 결정적일 수 없고 “어떤 진동적 지속(une durée tremblée), 곧 어떤 리듬 속에 살게” 된다(La terre et les rêveries du repos, p.83). 이제 자연스럽게 작가의 관심은 변화-생성 중인 상태에 있는 것들을 직접 향하게 됐다. <35° 52' 31.8288'' N, 128° 35' 4.4196>(2018)는 동일한 장소에 대한 경험이 시간의 경과-계절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현상에 대한 체험을 가시화한 것이다. 그것은 내게 바슐라르가 예찬한 “같은 것 한가운데서 다른 것을 찾는” 리듬분석의 결과물로 보인다.
<리듬분석>으로 명명한 최근의 작업들에서 최경아는 자신의 눈과 귀, 그리고 코와 피부를 자극한 감각의 진동을 이미지로 가시화하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이 경우 작가는 예전처럼 (공간좌표가 지시하는)외부의 특정 공간-장소의 경험에 주관적 가치를 부여하는 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기보다는 자신의 리듬을 지침(reference)으로 삼아 대상 안팎의 리듬을 함께 듣고 연결하는 식으로 작업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 즉 르페브르(Henri Lefebvre)가 지적한대로 리듬을 파악하는 일은 자신의 몸을 앞세울 수밖에 없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대상을 “느리다”고 판단할 때, 그 판단의 기준은 자기 몸(의 리듬)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 몸의 리듬과 비교하여 느린 것일 따름이다(Henri Lefebvre, 정기헌 역, 『리듬분석』, 갈무리, 2013, p.91). 따라서 리듬분석가는 자신의 모든 감각을 소환하여 대상과 세계의 리듬을 헤아린다. 청진기로 환자 몸의 리듬을 측정하는 의사처럼 리듬분석가인 작가는 자신의 호흡, 혈액순환, 심장박동, 말의 속도 등을 분석의 기준으로 삼게 될 것이다. 작가의 리듬분석을 통해 객관적 리듬들이 작가 자신의 리듬들로 번역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리듬분석가가 ‘자기 몸의 리듬’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 살아있는 몸을 준거로 삼는다는 것은 작가의 리듬분석이 대상과 동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어진 자극을 몸이 감수,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르페브르를 인용하면 “하나의 리듬을 붙잡기 위해서는 먼저 그 리듬에 붙잡혀야 하며 그 리듬이 부여된 시간의 ‘내부에’ 몸을 맡기고 빠져들어야 한다”(『리듬분석』, p.226)는 것이다. 하지만 리듬을 체험하는 동안에는 그것을 분석할 수 없다. 리듬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벗어나 외부에 자리해야 한다. 따라서 리듬분석가의 자리는 내부이면서 동시에 외부이다. 그는 “자신의 몸과 체험된 시간성 속에서 사유하는”(『리듬분석』, p.92) 존재여야 한다. 같은 이유로 리듬분석가는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회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리듬분석가는 구상적이면서 동시에 추상적인 회화를 그리게 될 것이다. 최경아의 <리듬분석> 연작처럼 리듬분석가의 회화는 묘하게 구상적이면서 동시에 묘하게 추상적이다. 그것은 구상과 추상이 분리될 수 없는 수준, 자신의 리듬과 타자의 리듬이 서로 뒤얽혀 상호작용하는 수준을 드러낸다.
그런데 <45° 30′ 0″ N, 73° 32′ 37″ W>(2011)로부터 <리듬분석> 연작으로의 이행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지금 내 앞에 작가가 자신의 몸에 주어진 청각 자극들-소리들의 리듬을 분석한 회화가 있다. 이 작가의 전작들에 나타난 ‘불완전한 심리적 공간’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내게 불완전하다기보다는 독특한 긴장상태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떠들썩하지만 꽤나 안정적인 역동적 평형상태를 제시한다. 어쩌면 리듬분석을 통해 이 화가는 상반되는 것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방식, 주어진 감각을 자기 몸의 리듬에 조응시키는 방식을 터득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가하면 리듬분석을 통해 청각적인 것, 후각적인 것, 촉각적인 것이 시각적인 것으로 변형(해석)되는 양상에 주목해볼 수도 있다. 이러한 변형은 옛 사람들이 “가장 좋은 묘사”로 불렀던 바, “귀를 눈으로 삼는 묘사”(La terre et les rêveries du repos, p.82)로 이어질 수 있을까? 물론 지금 상태만으로도 최경아가 화폭에 가시화한 리듬들, 그 율(律)의 진동에 고스란히 몸을 내맡기고 되는대로 내버려두는 일은 즐겁기 그지없다. / 홍지석 (Hong Jisuk, 미술비평, 단국대 초빙교수)
출처: 갤러리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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