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스페이스3
2021년 10월 28일 ~ 2021년 12월 11일
아무것도 아닌 것을 에워싼 숨결
“진정한 시는 말하면서 닫아 버리는 말, 말의 폐쇄된 공간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시인이 공간을 키우고 리듬에 맞춰 사라지기 위해 스스로를 소진하는 숨 쉬는 내밀성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에워싼 내면의 순수한 화상(火傷)”
-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2011, 그린비, 207쪽)
“토로록 틱 티딕 톡, 톡.” 각진 곳 하나 없는 매끈한 작은 돌멩이 한 개가 화면 위에서 튕겨 구르기를 반복한다. 고요한 작업실을 채우는 건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뿐이다. 언제쯤 돌 구르기가 끝날지 알 수 없다. 최상철은 손안에 들어오는 제각각인 크기의 자갈 중 하나를 선택하여 검정 아크릴 물감에 적신 후, 캔버스 위에서 이처럼 굴리기를 반복한다. 굴리기를 위하여 캔버스 측면에 손잡이 역할을 겸한 틀이 덧대어진다. 돌 구르기가 멈추는 때는 자신의 몸에 묻은 물감이 완전히 사라질 때이다. 이 과정을 그만의 미학적 형식으로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예술을 빌미로 한 놀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여하튼 이와 같은 비정형적인 작업 과정을 거쳐 화면 안에는 그만의 시간과 공간이 피어난다. 돌이 굴러가는 시간만큼의 흔적과 그 움직임을 그대로 받아들인 얼룩의 변증법은 작가가 작업을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떠오르게 한다. 비유해보자면, 자연의 시간, 그러니까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뜨고 지는 절대적인 시간 안에서 구르는 돌은 상대적인 시공간을 창조한다. 한 작품당 한 개의 돌을 사용하여 천 번의 구르기가 끝나면 작업도 완성된다. 천 번이라는 숫자가 특별히 마음을 건들지만, 그 역시 인위적인 사유의 한계가 만들어낸 상징일 뿐이다. 아마도 작가에게 천 번이란 횟수는 작업을 멈추기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숫자가 아닐까. 요컨대 작가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의미에서 벗어나는 게 어쩌면 작업을 하는 이유 중 하나일 터. 우연의 법칙에 따라 나타나는 예측 불가능한 세계를 환대하는 것이야말로 미학적 충돌이 발생하는 순간일 것이다.
캔버스 위에 물감이 묻은 돌을 놓는 순간부터 작업이 시작된다. 캔버스를 움직여서 돌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운동성을 받으려면 작가의 몸에 비례하여 화면의 크기가 결정된다. 최상철은 주어진 회화의 형식을 자신의 몸에 맞춰 재편한다. 중요한 건 바로 모든 작업이 그의 몸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근대미술의 실험은 캔버스의 크기와 물성도 회화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이자 담론으로 확장시켰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작가의 몸과 회화의 관계를 다룬 사례는 흔치 않다. 오히려 작가의 자아를 부풀려 작업의 규모를 키운 경우는 빈번했던 편이다. 워낙에 탈형식적 측면이 강하기에 캔버스와 신체의 관계는 비교적 덜 드러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미니멀리즘 미술이 공간과 신체의 관계를 탐구한 것처럼 그의 예술세계를 풍부하게 관측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자 다시 그의 작업 방식으로 되돌아가 보자. 그렇게 캔버스의 크기가 결정되면 곧 놀이가 시작될 것이다. 그는 우연의 법칙을 따른다. 이것은 매우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이루어진 법칙으로 언어적 설명이나 의미를 벗어난 작가의 태도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즉 최상철의 회화는 무엇을 말하지도 어떤 대상을 지시하지도, 그렇다고 의미를 내포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회화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나아가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 가라는 물음이 뒤따른다. 이러한 미학적 질문은 근대 이후 예술이 당면했던 문제였고, 가상과 현실 사이에서 길을 찾고 있는 동시대 미술의 고민이기도 하다. 예술을 표현하는 언어를 포기하려는 결심은 단지 언어를 버린다는 결정론적 행위가 아니라 과연 언어가 무엇인지를 되짚어보자는 반성의 요구와 맞닿아 있다. 파울 클레는 놀이를 통하여 그림의 원형을 되찾았고, 존 케이지는 음악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소리의 가치를 제시했으며, 아그네스 마틴의 선 긋기는 깊이에의 욕망을 버리고 오로지 평면 안에서 수직과 수평의 기하학적 관계로 세계를 사유했다. 이러한 예술의 실험들이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술이 세계의 모방에서 벗어나 존재라는 본질을 탐구하라는 요청이었다.
20세기 중반 추상 모더니즘은 근대 세계의 붕괴와 접합 사이에서 출현했다. 한국의 모더니즘 미술 역시 냉전 시대의 이념 안에서 동서양의 정신과 물질, 양식과 이념의 혼합물로 형성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숭고한 한 시대를 대표하는 기념비적 양식이 되고 말았다. 한편 최상철은 화단의 경향과 거리를 두고 자신이 선택한 묵음의 세계에 몰두한다. 그림이 되기보다 그림의 틀에서 벗어나기를 반복하면서 어떤 가시적 해석이나 형상에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작업 방식을 거듭 고안한다. 그의 작업 방식을 두고 구도자적 혹은 수행적이라는 상투적인 수식은 낡은 의미를 재생산할 뿐이다. 아마도 작가는 이러한 수식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예술을 하는 이유가 깨달음을 찾기 위한 구도자적 수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사유의 바깥을 향하고 있다. 사유의 바깥이란 언어의 바깥이자 언어로 묘사될 수 있는 세계를 벗어나려는 실천이다. 즉 그에게 회화는 시를 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시는 형식이 아닌 사유의 방식이다. 따라서 그는 사유를 위하여 그리기의 형식을 벗어낸 채로 그리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미메시스가 재연될 수 있는 고리를 봉쇄해버린다. 들뢰즈(G. Deleuze)의 개념을 빌리자면 완전한 탈주선(flying line)을 그리는 중이라 부를 수 있겠다.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는 인류의 진화 과정을 생존에서 놀이로, 노동에서 예술로 변한다고 보았다. 구석기시대에 등장한 호모 파베르, 즉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생존을 위해 돌로 필요한 도구를 발명했다. 기후가 온화해지면서 생존의 도구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적 도구로 전환된다. 생존이 우선되는 시대를 벗어나자 생각하는 인간은 이미지를 통하여 주술적 의미를 담은 그림 놀이를 시작한 것이다. “이제 평온해진 인간의 활동은 곧장 노동으로만 연결되지는 않게 되었다. 바로 이때부터 예술 활동이 더해졌다. 생존에 유용한 활동만 있던 터에 놀이라는 활동이 더해진 것이다.”(조르주 바타유,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마네, 워크룸프레스, 2017, 51쪽) 알다시피 놀이는 쓸모와 무관하게 기쁨을 목적한다. 바타유는 더 나아가 언어가 만들어지면서 노동과 도구 사이에 존재하는 감각적인 측면이 사라졌다고 해석한다. 즉 언어에 의하여 대상/사물이 가진 감각적인 면을 없애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바타유는 이처럼 감각적인 것의 상실이 예술의 필요성을 끌어낸다고 보았다. 바타유가 사유한 예술의 존재 이유는, 무엇보다 언어 너머의 세계, 의식을 벗어난 감각적 자율성을 되찾는 시적 세계와 조우한다. 한편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는 시를 “열린 세계”라 명시했다. 열린 세계는 무엇을 바라는 공간이 아니다. 오로지 가장 내면적인 것을 향한 순수한 소비가 일어나는 공간이다. 존재는 소진되는 것이며, 그것이 또한 존재의 본질이란 건 그 누구도 모를 수 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세계는 인간을 존재로 보기보다 사회적 기준으로 판단한다. 그렇게 존재의 바탕은 현실에서 지워지고 만다. 그러므로 예술이라는 시적 세계는 말의 자율성을 요청한다. 내밀한 존재 자체에 다가가는 것이 곧 시인의 활동, 예술가의 실천이 아니겠는가. 관습과 의식으로 굳어진 언어가 아닌 자신만의 말을 찾아가는 길이 곧 예술을 실천하는 방식이다. 최상철에게 작업은 존재의 순수한 소비에 다가가는 과정이다. 끝으로 그렇다면 완전한 추상에 도달하는 게 가능할까 질문해 본다. 최상철의 작업 방식은 순수한 소비, 놀이로서의 예술을 실천하는 하나의 미학적 방법으로 보아야 한다. 완벽한 추상은 작업의 목적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구상과 추상의 구분 이전에 박영택이 말한 것처럼, 가장 자연에 가까운, 인위적이지 않은 미술의 원형성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의 법칙은 때로는 어떤 형상을 연상시키거나 비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몇 작품(“無物 21-6”, “無物 21-7”, “無物 21-8”)은 자연의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자연을 닮거나 그것을 연상시키는 형상들도 결국 우연의 결과이다. 요컨대 최상철의 회화는 작가에 의하여 완전히 통제된 세계가 아니라 작가와 작업, 행위와 결과가 자율적인 관계를 맺는 세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감상과 해석 또한 오로지 보는 이의 몫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작품은 작가의 이름이 사라진 익명의 것이 되어 공통의 것이 될 수 있다. 저자성 또는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 작품을 감각하는 자율성은 모두에게 주어진 권리이기 때문이다.
정현(미술비평, 인하대)
참여작가: 최상철
출처: 아트스페이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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