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가비
2015년 8월 20일 ~ 2015년 8월 29일
피부, 흔들리는 경계 #3 120x180cm Digital print, ed. 10 2015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함민복
모든 것의 경계에는 흔들림이 있다. 내 몸이 내 몸 아닌 것과 구별되듯이 사물/존재의 경계는 겉보기에 명확하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그것은 이쪽과 저쪽이 서로 스며들어 있는, 양극을 수렴하는 모호한 장소임을 간파할 수 있다. 지도 속의 이미지와 달리 실재에선 밀물과 썰물로 혹은 파도로 인해 항구적으로 유동하는 해안의 갯벌이나 모래사장의 영역처럼.
피부는 경계다. 안으로는 내 몸의 뼈와 뇌와 오장육부를 감싸고 밖으로는 나 아닌 것과 구별하는 나/존재의 최전선이다. 우리의 오감은 피부의 주요 거점에 분포하는 성문(城門)이다. 손과 발이야 두말할 것 없겠지만, 우리의 눈도 코도 귀도 혀도 모두 피부(의 일부)다. 살아있는 한 그 성문들은 작동하며 작동함이란 열림과 닫힘의 반복 순환을 피할 수 없다. 성문들을 통해 나의 바깥들을 받아들이고 나(내 안에 있던 것)를 뱉어내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에 닫혀 있는가 하면(나다움, 나로 존재함) 동시에 열려있는(나 아닌) 것이다.
최원진에게 이번에 피부로 명명한 사물의 표피는 늘 그 피부가 지시하는 그 사물이자 다른 것이었다. 자신의 몸을 접사하여 다양한 지표면의 풍경을 연상시키거나(풍경으로 만난 나, 2000), 말라버린 채소 속에 생명의 비약을 역설하는가하면(All Living Things are Beautiful, 2005) 그 조그맣고 보잘 것 없는 채소들의 단면에서 무모하리만큼 광대한 공간감을 끌어들이고자 했다(Landscape, 2011).
이제 그 은유의 방식이 노골적이고 직설적으로 전환되고 있다. 채소들은 여기서 껍질이 아닌 피부, 살갗을 가진 존재, 동물, 혹은 사람으로 환유된다. 일생 제자리를 지키는 수동형으로서의 생물에게서 땀 흘리고 고통을 느끼며 유혹하는 강한 의지를 품고 꿈틀거리는 능동형으로서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연출, 아니 포착해 내고 있다. 여태까지의 작업에서는 피사체의 표정이 작품의 첫 대면에서부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다른 것’으로 보여 지도록 의도되었다면 이번 작업에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상의 표면적 속성을 더욱 강화해서 솔직하게 보여주는 방식으로의 전환이 눈에 띄는 변화라고 할까. 빨강은 더욱 빨강으로. 거칠음은 더욱 거칠음으로. 카메라 주변에 늘 가까이 두고 들여다보아 온 사물을 끈질기고 일관된 방식으로 사유해 온 여정의 반환점일까 종착점일까, 그 여정의 많은 부분을 곁에서 지켜봐 온 입장에서 짐작컨대 작업으로 육화된 정신적 완숙과 대긍정, 대극의 합일(the union of opposites)으로의 진입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한의원에서 한 번이라도 침을 맞아 본 사람은 몸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왜냐면 만일 일개 몸뚱이가 그 구성 성분의 모체인 우주와 우주질서의 정교한 표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쉬이 받아들기 어렵다면, 최소한 그 몸의 표면, 즉, 침을 받아들이는 피부는-겉보기에 여전히 연관성을 쉽게 유추하기 난처한-자기 몸 내부의 연장이요 내부에서 밖을 향한 최전선이라는 것을 체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유사한 맥락으로 최원진의 작업은 껍질이 곧 중추라는 것에 방점을 가한다.* 종래의 작업이 필자가 토를 단 바처럼 ‘헛되고 헛되도다’의 바니타스(Vanitas)적 사유(All Living Things are Beautiful)를 투영하고 있다면 이번 작업에서 보는 바와 같은 위협적일 만큼 거칠 것 없이 ‘자기’를 토해내는 색의 도발이 겨냥하는 기착지는 그가 늘 변함없이 견지해온 역설의 변증법으로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여기서 공이 단순히 ‘궁극적 허망함’이란 일면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부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아주 오래전부터 지구상 도처의 바위에, 책에, 대대로 이어지는 장로(長老)들의 음성에 반복적으로 새겨진 잠언들의 메아리를 듣는다. 겉과 속, 나아가 이것(채소)과 저것(육신)이 사실은 둘이 아님을, 각각의 표면은 그 토대, 근원에 맞닿아 있음을. 그렇게 사물은, 각각의 존재들은 애써 인도받지 않아도 멀어 보이는 무수한 다른 존재들과 연접해 있음을 자각하기. 육화된 채소에게 연민을 가져야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그가 현란한 색채로 위장한 무심한 어투로 기실은 일상의 성화(聖化)를 역설하고 있지 않나 의심한다.
그리하여 이쯤에서 또한 우리는 자연스레 그가 왜 이토록 집요하게 표피에 집중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풀어줄 실마리를 가늠하게 된다. 그의 작업은 한마디로 삶의 가장자리에서 경험하는 깊은 경외심이 조형해낸 생의 경이(驚異)에 대한 진술이다. 고락의 세월을 나누어 온 친구로서 나는 그것을 자신의 또 다른 눈인 렌즈와 함께 줄곧 닦아 온 겸허함으로 읽는다.
하나의 사물이 ‘그것(다움)’으로 응결된 순간, 그것은 ‘그것 아님’으로 열린다. 생의 에너지를 단단하게 응집시킨 봉오리가 완성되자마자 스스로 꽃으로 벌어지듯이. 봉오리가 멸(滅)하고 새로운 생으로 도약하다. 모두 하나의 나뭇가지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자신보다 큰 것으로의 귀속이다.
2015. 6. 전상용.
* ‘피부는 육체를 감싸는 자루임과 동시에 외계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는 감각기관’인데 그 ‘피부는 단순한 자루도 중추를 섬기는 말단도 아니다. 피부와 뇌는 계층적인 관계가 아닌 기하학적인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피부는 종속적이지 않다. 피부를 뇌의 확장으로서, 뇌를 개켜놓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본질은 피부에 있다.’ - 미나토 지히

피부, 흔들리는 경계 #1, 180x120cm, Digital print, ed. 10, 2015

피부, 흔들리는 경계 #6, 120x180cm, Digital print, ed. 10, 2015

피부, 흔들리는 경계 #8, 120x180cm, Digital print, ed. 10, 2015
출처 - 갤러리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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