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팩토리
2021년 12월 5일 ~ 2021년 12월 26일
<허구가 불멸에 도달하기까지>
1. 신화와 전설의 전멸
우리는 신화와 전설이 전멸한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무지의 장막이 걷히고, 사실주의와 실존주의가 대두되며, 산업혁명을 통해 근대화의 물결이 세계를 덮었다. 수많은 믿음이 미신으로 취급되었고, 허구들은 문학과 영화의 세계로 격리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신화와 전설이 과거와 같이 믿음을 바탕으로 생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허구와 실재의 세계가 중첩을 이루고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현대사회에서 신화와 전설이 어떻게 생산되고 있는지 추적하고 신화와 전설 같은 허구의 세계가 현 세계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2. 멀티버스의 관점으로 허구의 세계를 증명하기
과학은 물리적 법칙을 통해 신화와 전설을 허구의 세계로 격리시키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렇다면 반대로 현대 물리학으로 신화와 전설이 가능한 세계를 증명할 수 있을까? 과학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다양한 형태의 평행우주에 대하여 논의해왔고 인플레이션 우주론과 다중우주론에 대한 가설과 증명의 시도를 반복하고 있었다. 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기에서 관찰되는 분명한 패턴을 수학에 대입하면 어김없이 다중세계가 발생한다는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다. ‘결정론과 자유의지’라는 조금은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확률로 계산하면 0.001% 미만의 작은 가능성이지만 물리적 역학에서 벗어난 세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추론이다. 그리고 이 작은 확률을 실험하기 위해 다시 물리학에서는 시뮬레이션 우주를 도입했다. 컴퓨터에 조건을 입력하여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다. 컴퓨터는 이 조건들에 시간을 대입하여 어떤 변화들이 생기는지 산출하고 여러 다양한 조건들을 대입하여 경과를 지켜보는 원리이다. 대입한 조건에 따라 우리가 알고 있는 익숙한 세계가 만들어질 수도 혹은 우리가 허구라고 생각했던 세계가 펼쳐질 수 있다. 정밀한 조건 입력으로 더욱 황당한 우주를 발생시키는 것이 가능해진다. 사실상 지금의 기술로는 지구만 한 크기의 컴퓨터가 1초당 10의 33제곱의 정도의 연산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100년동안 살아가는 (주변인과 환경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 부재한)삶 정도를 시뮬레이션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조건의 변경을 통해 신화와 전설이 공존하는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생긴다. 뿐만아니라 이 이론은 더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존세계가 치밀한 시뮬레이션일 수 있다는 가정도 가능하게 만든다는 부가적인 아이러니도 함의하고 있다.
3. 분석철학의 시뮬레이션 우주는 합당한가?
어느 소설가가 먼 미래에 1초당 10의 33제곱 이상의 연산이 가능한 컴퓨터가 존재하는 이야기를 공상과학 소설로 집필하였다. 그리고 먼 미래에 정말로 그 일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정밀하게 미래를 예측한 보고서가 될 수 있을까? 이번에는 어느 미래학자가 먼 미래 어느 시점에 1초당 10의 33제곱 이상의 연산이 가능한 컴퓨터가 존재할 것이라는 예측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미래의 그 시점에 역사가 예측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버렸다. 그렇다면 그 보고서는 소설의 역할을 대신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방식으로 철학이 때로는 물리학 보다도 더 급진적으로 사고하기도 한다. 분석철학은 기호논리학을 기반으로 사회적 현상보다는 언어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으며 논증을 바탕으로 발전한 학문이다. 그리고 조건을 생성하고 언어적 논증을 통해 가설에 접근한다는 점이 시뮬레이션 우주의 방법론과 유사하다. 하지만 분석철학과 여기서 파생되는 가능세계론이 던지는 질문은 과학의 범주와는 차원이 다르다. 만약 어떤 이론물리학자가 한 사람이 살아온 100년동안의 삶을 계산하려면 1초당 10의 33승의 연산이 가능한 지구 만한 크기의 컴퓨터가 필요하다고 가정한다면 분석철학자는 가능주의(허구의 세계)와 현실주의(물리적 세계)의 공존을 증명하기 위해 시뮬레이션 이론이 과연 정당했는지 되물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자의 예측이 벗어났을 때 이것은 과학이 아닌 소설(허구)에 도달할 가능성을 분석철학자는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석철학에서는 허구를 단순히 상상을 요구하는 이야기로 정의하지 않고 가능성의 세계로 열어 둔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가능주의 철학에서는 신비주의와 현실이 공존하는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고 논증하며, 심지어 소설 속의 인물이 언어적 논증을 통해 우주 어디에 존재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단지 그 세계가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와 응용방법에 대한 고민이 더 다양할 뿐이다.
4. 러시아 우주철학에서의 허구들
지금까지 과학과 철학의 관점으로 물리의 세계와 허구의 세계의 공존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이미 오래전에 이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고 있고 심지어 영생까지 하고 있는 세계가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러시아 우주론은 우주를 과학, 종교, 예술, 사상, 기호, 전설, 미신 등 인간의 모든 사유체제를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바라보며 시작한다. 그 이유는 우주론의 시작점이 인간이 우주에 도달하기 이전이기도 하였고 데카르트, 뉴턴, 베이컨 등으로 대표되는 17세기 이원론적 서구 사상과 유가, 도가, 불교 등으로 대표되는 일원론적 동양 사상의 경계에 지리적으로 러시아가 위치해 있기에도 가능했다. 부활과 영생의 개념은 니콜라이 표도로프의 저서 <공동과업의 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현 세대의 희생을 발판 삼는 모든 진보를 지옥으로 규정하고 부활을 통해 그 희생자들을 모두 지옥에서 꺼내 우주에서 불멸하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물론 이 불멸의 의지에는 인간뿐만 아닌 인간의 모든 사유체제가 해당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불멸은 누구를 위한 불멸이며, 불멸의 장소는 어째서 우주가 되어야 하는가? 우주론에서의 불멸은 서구철학의 보편적인 변증법적 정반합과 괘를 달리한다. 정반합의 원리는 기존 사조를 부정하며 해체하고 보완하여 더 나은 단계로의 발전을 지속적으로 반복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보의 대가로 반복적인 희생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반면 러시아 우주론에서는 기존의 사조는 물론이고 죽은 사조까지도 부활시켜 모두가 함께하는 불멸을 기원한다. 표도로프가 말하는 공동과업은 세상 모두를 위한 아카이브이며 죽지 않는 의식의 바다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더 이상 아무런 희생을 감내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안톤 비도클에 의하면 우주론을 칭하는 코스믹이 ‘공간’이 아닌 ‘조화’, 더 나아가 ‘아름다움’을 뜻한다고 하였다.
5. 일상에 불멸의 감각을 위치해보기
허구세계를 증명하려는 이 말장난 같은 시도는 어쩌다 보니 모두를 위한 불멸의 경지에까지 도달하게 되였다. 마지막으로 러시아의 미래주의 오페라 <태양에 대한 승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카지미르 말레비치가 무대를 디자인하였던 이 오페라는 태양을 정복하고 시간을 퇴위시켜 이성을 폐지하자고 주장한다. 태양이 상징하는 자연의 질서를 거부하는 것은 결국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다는 논증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대장치의 일부로 태양을 표현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 더 타당하게 느껴진다.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여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이 이 기나긴 논증과정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상식을 거부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신화와 전설이 공존하는 세계를 찾아보는 것으로 서두를 시작했고 이론물리학의 개념과 분석철학의 관점을 동원하였다. 더 나아가 이미 일원론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던 우주론을 대입하여 상식을 상회하는 불멸의 개념을 짚어보았다. 이 논증은 사실 일상을 뒤집어 보기 위한 사소한 시도에서 비롯되었고 이를 통해 삶을 통찰하는 다양한 방법론을 찾아보기를 기원한다. 다큐멘터리 <조도로프스키의 듄>을 보면 실제로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듄>프로젝트는 기획단계에서 실패하여 영화화되지 못한 프로젝트의 영향력을 쫓는다. 비록 영화는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구현되지 못했지만 그 설정자료집과 스토리보드는 헐리웃을 돌며 수많은 다른 SF영화들의 원천이 되어왔다. 그가 만들어낸 허구는 시행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죽지도 사리지지도 않고 지금까지도 영화산업의 밑재료가 되었다. 재미나게도 다큐멘터리 말미에 조도로프스키는 후대에 그가 미친 영향을 통해 300년 이상을 살겠다며 영생을 외쳤다. 어쩌면 그의 방식이 상식을 넘어서는 작은 행위였고 일상에 불멸의 감각을 위치시켜보는 시도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그런 삶의 통찰력이 필요한 시기에 가까워졌다.
기획: 옥상팩토리, 황금향
작가 : 김동준, 박지원, 배기태, 오주성, 오제성, 이세준, 정성진, 황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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