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익갤러리
2018년 10월 17일 ~ 2018년 10월 31일
접시꽃, Althaea Rosea Cavanil, 150x150cm, Oil on Canvas, 2018
한운성-꽃의 리얼리티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한운성의 그림은 항상 단독의 특정 형상이 화면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고 주변은 단색의 색면으로 마감되어 있는 형국이다. 따라서 구상과 추상이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사실적 이미지와 모노크롬한 바탕, 재현과 평면성, 그림과 문자, 빛과 그림자 등 이원적 요소가 팽팽하게 긴장감을 이루며 조여져 있는 형국이다. 구체적인 삶의 공간에서 절취되어 적막한 화면에 내던져진듯한 이미지는 작가가 현실에서 발견, 채집한 오브제이자 생각거리를 안겨준 사유의 대상이기도 하다. 대단한 일루전을 주는 묘사와 경쾌하고 활력적인 붓질, 짙은 그림자를 거느리며 등장하는 이미지는 단단한 존재감을 구현하며 실존하고 있다. 단색으로 단호하게 마감된 배경은 그려진 이미지를 강조해주는 모종의 막으로 기능하면서 펼쳐진다. 바탕 면의 하단, 이미지 바로 밑에는 그려진 특정 꽃의 라틴어 학명이 사인과 함께 기입되어 있다. 그것은 흡사 텍스트의 기능을 한다. 그려진 꽃을 지시하는 동시에 그것의 재현을 재확인하고 있다. 그림인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대상의 재현임을, 그림과 대상이 등가의 관계임을 방증하고 있다.
근작인 ‘꽃’시리즈는 꽃 한 송이의 중심부로 곧장 육박해 들어가는 시선이다. 오로지 꽃의 내부를 정면으로 응시하게 된다. 비로소 관자들은 꽃을 다시 보게 되고 그 존재에 대해, 그것의 본질에 대한 생각하게 된다. 꽃의 본질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꽃에 대한 관습적 사고나 학습, 상식 등에 의한 경화된 의식이 꽃을 일정한 편견 속에서 보게 만든다. 따라서 꽃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기란 무척 힘든 일이다. 꽃을 아름답다고만 보는 것은 지극히 왜곡되거나 편향된 시선일 것이다. 한운성은 흔하게 보던 꽃, 그래서 잘 알 것 같지만 볼수록 난해하고 이질감이 도는 꽃 한 송이를 놓고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리고는 “너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보이는 꽃의 외관 뒤에 자리한 모종의 본질을 질문하고자 했다. 꽃이라는 존재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식물성인 꽃은 인간에게는 영원한 타자다. 아니 주체인 한 인간의 몸 바깥에 자리한 것은 궁극적으로 타자이며 주체 역시 스스로에게도 영원한 타자에 해당한다. 이처럼 대상은 바라보는 이에게 언제나 타자다. 작가란 존재는 대상/타자를 들여다보는 자이며 그림은 바라본 대상/타자를 드러내는 일이다. ‘드러내기’란 이른바 리얼리티의 추구이자 대상의 정체를 밝히는 일을 말한다. 한운성에게 있어 꽃을 그리는 일은 꽃의 본질을 드러내는 일이고 그것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일이다.
한운성은 오랫동안 “구체적인 물질의 세계에서 현대의 리얼리티를 잡아내려는 충동”에 끌려 직업을 해왔다. 따라서 그는 대상과의 내적 필연성을 매우 중요시 한다. 그것은 “본인이 직접 체험한 것, 육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체험한 것을 표현”하려는 것이고 이는 작가에게 있어 작품의 진정성을 담보하는 매우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그가 오랫동안 그려왔던 모든 대상은 현대 문명과 동시대 한국사회가 대면한 여러 문제를 반영하는 모종의 징후적인 이미지들이고 그 이미지를 빌어 현실을 응시하는 자신의 내면을 은연중 투영해왔다. 근작인 꽃 그림 역시 그렇게 선택되었다.
최근에 작가는 몸이 아파 근 1년 동안 작업을 쉬면서 자신도 모르게 생명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자신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꽃들이었다. 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 해서 호박꽃, 원추리, 진달래, 장미, 라넌큘러스 등 주변의 소박한 꽃들에 새삼 눈길을 주고 이를 그렸다. 겉으로 드러난 꽃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치열한 생명의 노래와 냄새가 들리고 나는 꽃, 꽃이 지닌 생명의 근원과 본질을 드러내 보여주고자 했기에 활짝 핀 절정의 꽃에서부터 시들어 죽어가는 꽃, 떨어진 꽃잎 등 다채로운 양상의 꽃을 그렸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절정을 유지하는 꽃의 생태는 유한한 생명의 은유이고 잉여의 차원에서 자리한 꽃의 아름다움은 예술의 속성과 겹쳐진다.
과일 그림에서는 한결같이 꼭지가 중심이었다면 꽃은 꽃의 내부가 핵심이다. 그 중심부에서 사방으로 확산하는 꽃잎과 팽창하는 수술이 매우 강렬하게 시선을 끌고 보는 이의 시선을 낚아챈다. 하나의 결정적인 꽃이 존재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고 내가 꽃을 보고 있다는 사실, 꽃의 내부와 직면하고 있다는 현실을 강하게 추인시키는 그림이다. 이 실재성은 또한 구상적 표현에 기인한다. 진부해보일 수 있는 구상적 표현은 한운성에게 있어서는 보이는 대로의 대상에 포박당하기 보다는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가공될 여지가 많으며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세계가 된다. 따라서 관습적인 차원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재현을 시도한다.
작가는 <과일채집>시리즈와 마찬가지로 꽃 이미지 자체를 상당히 개념적으로 만들고 있다. 납작한 화면에 단독으로 설정된 꽃은 화면과 붙어 있으며 하단에는 라틴어 학명이 기재되어 있다. 그려진 그림이 특정 꽃이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확정하고 있다. 기표와 기의의 일치를 주장하는 셈이다. 작가는 기표와 기의의 불안정한 관계를 최소화하기 위해 라틴어 학명을 쓰는데 분류학에서 쓰이는 이 학명은 언어, 시대의 변화와 무관한 것이다. 그러니 라틴어 학명은 특정 꽃의 객관성을 부여하는 공통된 표기로서의 의미가 있으며 그것은 꽃에 달라붙는 서정성이나 아름다움과는 무방하게 오로지 그것 자체를 목표로 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 꽃은 단색의 바탕을 배경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밀고 올라오는 느낌이다. 캔버스의 2차원성과 3차원의 환영성이 교묘하게 어우러진 그림에는 빛과 그림자가 강렬하게 드리워져 있다. 꽃잎에 파고드는 햇살은 생명의 근원이고 그로인해 드리워진 그림자는 그 결과이다. 생사가 한 몸에 얽혀있는 형국이다.
꽃의 재현이지만 그것의 기계적 복사, ‘유사’가 아니라 그것의 회화적 이미지로 환생한다. 그림이 사진처럼 대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생명력 있게 떠내거나 그 존재의 출렁임, 그것을 보는 이의 감동 같은 것을 화면 바깥으로 진폭 있게 울려 내려한다고 보기에 나로서는 ‘기운생동’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더구나 떨리는 붓질의 감각적 처리는 동양화의 예리한 필선의 맛, 운필의 운용을 닮았다. 꽃의 묘사가 아니라 꽃의 생명력을 표출하려는 시도 역시 동양화의 사의성이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다. 물론 모든 좋은 그림은 대상의 이면 너머를 궁극적으로 파헤치려는 시도를 지닌 것이다.
한운성은 구상적 표현은 유지하되 재현 형식의 변화를 도모하면서 다양한 선묘와 붓 터치를 활용하여 작품이 본질적으로 ‘회화’라는 사실을 부단히 상기시킨다. 이때 손의 감각, 작가의 육체적 감각을 부단히 삽입시킨다. 여기서 붓질은 그림을 이루는 기본 단위인 동시에 눈으로 본 대상을 손을 통하여 인식하는 잣대이자 여전히 한 인간의 몸의 실존적 흔적으로서의 기술記述에 해당한다. 탈신체성으로 치닫는 오늘날 문화 속에서 회화는 실존의 마지막 보루를 담당하는 중요한 사례가 된다. 따라서 그 붓질은 여전히 회화의 존재를, 그림 그리는 주체의 자리를 강력하게 진술한다.
한편 그려진 꽃의 종류에 따라 붓 터치는 제각기 다른데 이는 꽃잎의 질감, 두께, 그리고 꽃에 대한 작가의 느낌과 인상에 따른 감각의 차이를 반영한다. 주의 깊게 표면을 보면 그림은 상당히 ‘경제적’으로 이루어졌다. 애초에 바탕색(아크릴)이 결정된 상태에서 그 위에 약간의 물감(유채)을 입혀서, 붓질을 가해서 그려나간 경우나 캔버스 생천을 그대로 살려 예민하고 가볍고 투명한 꽃잎을 재현하는 경우 등을 볼 수 있다. 꽃의 이미지는 손에 의해, 붓질의 흔들림과 격렬하고 감각적인 운동 속에서 ‘생성’되고 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꽃은 원본의 꽃과는 또 다른 꽃, ‘회화적 이미지’가 된다. 생명과정 자체를 그대로 추적하고 있는 그리기, 혹은 생명체의 조직과 그 섭리를 그림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나로서는 그림을 들여다볼수록 그림 보는 즐거움이 있다. 작가 또한 그림 그리는 재미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꽃그림이 있지만 이 꽃은 그것과는 또 다른 회화적 꽃으로 돌올하게 다가온다. 그림의 맛으로 충만한 체, 암수가 한 몸으로 들러붙은 식물성의 세계가 삶과 죽음을 동시에 거느리면서 내 앞에서 자지러지게 피어있거나 쇠락해간다. 생의 한 절정과 끝을 처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출처: 이화익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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